← 이북으로 보기

양기철 구술집

이북 원문에서 글자만 옮긴 전체 텍스트입니다. 표·그림·사진과 원래 모양은 이북에서 확인하세요.

3쪽

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집

성악가

양기철

4쪽

일러두기

1. 이 책은 충남문화재단의 <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사업>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2. 이 책은 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사업 연구단체로 선정된 당진시대 방송미디어협동조합의 연구진들이 구술대상자로 선정된 양기철 선생과의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채록하고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 되었습니다. 3. 이 책의 구성은 구술 채록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진이 재구성한 ‘양기철 선생의 생애사’와 ‘구술 채록 전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5쪽

4. 전사본의 경우, 독자가 읽을 때 난해하지 않을 범위 안에서 구어체, 사투리 등을 살려 현장성을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전사본은 처음 구술문을 그 대로 채록한 초본을 말합니다. 다만, 일부분 비공개 결정의 이유로 수록 되지 않은 내용이 있음을 밝힙니다. 5. 구술 채록 선정자는 ‘구술자’로 채록 시 질문 및 면담을 담당했던 연구자는 ‘연구자’로 통일했습니다. 6. 구술자의 구술 내용은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최대한 사실 관계를 확인 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다만, 사진 자료의 연도, 개인의 생활사 등 일부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7. ( )와 각주에는 면담 당시의 상황과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연구자의 덧붙이는 말 등을 적었습니다.

7쪽

제1장

예술의 불모지에 오페라·뮤지컬 씨 뿌린 선구자 양기철

양기철의 구술 생애사

- 연구원 심규상

8쪽

예술의 불모지에 오페라·뮤지컬 씨 뿌린 선구자 양기철

역사의 격동기,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접하다

그는 1947년 당진읍 구룡리 741번지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전쟁을 앞둔 역사 적 격동기였다. 호적에는 2년 늦은 1949년으로 돼 있다. 아버지 양인섭(梁仁燮) 과 어머니 차정례(車貞禮) 님 사이에서 7남매 중 맏이다.

그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다. 그를 음악에 눈뜨게 하고 음악으 로 이끈 이도 아버지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서산 운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홍성 공립농업전문학교(5년제)를 다녔다. 그때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일본인 음악 교사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금관악기인 코넷 주자로 활동했다.

잠시 서산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정부가 문맹 퇴치 일환으로 교육공무원을 뽑자

9쪽

선친 양인섭의 초등학교 교사 당시 수업사진

10쪽

자격 검정고시를 통해 초등학교 음악 교사로 전환(1958년)했다. 첫 발령지인 당 진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면천초, 성당초를 거쳐 대전 목동초(1964년), 서대전초에 서 교장으로 퇴임했다.

“초등학교 가기 전 4, 5살 때 학교 운동회나 무슨 행사가 있으면 아버 지 자전거 뒤에 타고 따라다녔어요. 아버지가 오르간 연주를 하면 마 이크를 소리 나오는 곳에 대어 주는 심부름을 하며 즐거워했죠. 어린 시절 음악이 무엇인지 모르고 좋아했지만, 음악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부친이 음악의 삶을 전수했다면 어머니 차정례(1926년생)는 봉사와 종교적 삶을 가르쳤다. 그의 모친은 교회 권사 직으로 봉사활동을 즐겼고 돌아가시기 전(91세 사망)까지 성경책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거든요. … 김대건 신부 일대기를 작품으로 하기 위해서 솔뫼성지를 방문해 31번째 방문해 기도하고 결심을 했거 든요. 성 김대건 신부 일대기 오페라와 뮤지컬을 했거든요. 보이지 않 는 신앙에 대한 겁이 있었다면 못했을 거 같아요.”

초등학교 가기 전 서당에서 천자문 떼던 마을 분위기

할아버지는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의 한자를 가르쳤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사 일과 누에치기, 삼베, 길쌈을 했는데 90대까지 장수했다. 가정형편은 새경을 주

11쪽

는 일꾼 2명이 상주한 데다 부친의 교사 월급을 받아 어렵지 않았다. 구룡리 마을 은 남원양씨 집성촌으로 약 60여 가구에 200여 명이 거주(1962년 기준, 지금은 34가구 100여 명이 거주)했는데 타 성은 거의 없었다. 이중 몇 집을 빼고는 가 정형편이 어려웠다. 그래도 동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가기 전 천자문을 떼는 마 을 분위기가 잡혀 있었다.

“우리 집 위치에 서당이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이 초등학교 가기 전까 지 천자문 공부를 하고 학교를 갔어요. 아이들도 한문 공부는 하는 마 을 분위기가 있었죠. 농부들이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일하 고, 마을 앞산에 글 읽는 소리가 메아리치던 풍경이 눈에 선하네요.”

그는 고향에서 성당초등학교와 당진중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때는 6년 내내 학급 반장을 했고 전체 회장도 맡았다. 매주 한번 전교생 운동장 조회 시간에 맨 앞에서 ‘교장 선생님께 경례’를 선창하면 당시 박동원 교장 선생님이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박동원 교장님은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당진중 학교에 다니며 밴드부는 아니었지만, 연주를 구경하는 걸 즐겼다.

“그때 남영찬 음악 선생님이 밴드부를 지도하셨는데 밴드부를 따라다 니며 연주하는 걸 구경하고 다녔어요. 밴드부도 아니면서 학교 수업 땡땡이치고 다닌다고 혼이 나기도 했죠.”

12쪽

꿈꾸던 서울사대부고에 진학 … 일 년 여만의 대전 대성고로 전학

중학교 때부터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다. 아나운서의 축구 중계 실황에 빠져 흉내 를 내곤 했다. 중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서울고등학교에 합격한 김덕 영과 대전고등학교에 합격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손 아무개다. 그만큼 서울에 있는 학교를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1차 지원한 경복고등학교와 2차 동성고등학교(체육에서 낮은 점수) 모두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중학교 졸업 후 서울 종로 2가 제일학원에 다니며 고교입 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종로2가에 제일학원이라고 있었어요. 거기에 등록을 한 거예요. 4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도시락 싸주면 그거 두 개 가지고 그때 전 철이었어요. 거기 한강에서 영등포 본동이라고 있거든요. 거기에 전철 이 있어요. 아침에 차가 없어 거기까지 한 5분 정도 걸어서 삐거덕 삐 그덕 종로2가 가면 새벽 5시 30분 6시쯤 돼요 … 공부 안 하면 죽 는 줄 알았어요.”

서울사대부고에 합격했다.

“너무 기뻐서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한 뒤 한 학기 내내 교복 입고 교모 를 쓰고 잠을 잤어요. 그만큼 자랑스럽고 기뻤죠.”

서울사대부고 2학년이 되면서 난관이 찾아왔다. 그의 삶에서 힘든 일 중 하나였다.

13쪽

고교시절 가족과 함께

14쪽

“아버님이 당진 성당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서 대전의 목동초등학 교로 전근을 가시게 됐죠. 고향과 대전과 서울까지 세 집 살림을 지탱 하기가 어려웠던 거죠. 아버지께서 저를 대전의 대성고등학교로 전학 시켰어요”

노력 끝에 입학한 사대 부고를 떠나야 하는 심정은 견디기 어려웠다. 전학을 피하 기 위해 몇 달간 가출을 하기도 했다. 전학 초기, 대성고에 마음을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전학 왔다며 등교 시간 교문 앞에서 규율부와 야구부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양동이를 머리에 씌워놓고 구타를 하기도 했다. 학교를 그만둘까 고 민할 정도였다. 담임교사의 지도로 위기를 극복했다.

“담임 선생님이 책도 사주시고, 책가방도 사주시고 … 이상하게 그 때부터 안 때리더라고요. 규율부 애들하고 야구부가. 선생님들이 규율 부하고 야구부 담당 선생님한테 ‘양기철이 등교할 때 때리지 말라’ 이 야기한 것 같아요.”

아나운서 꿈을 접고 목원대 성악과에서 테너를 전공하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꿈은 아나운서였다. 그 때문에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가려 했 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경제적 여건상 서울 진학이 어려웠다. 마침 대성고 옆 감리교신학대학 음악교육과에서 첫 신입생 모집공고를 냈다. 음악 교사를 결심했 다. 음악을 이해하는 아버지도 음악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대전 역전 세광음악학

15쪽

대학사진

16쪽

원에서 시창과 가곡을 공부해 음악교육과 성악 전공에 합격했다.

신설한 음악교육과는 독립건물이 없어 신학교 도서관 지하 건물에 연습실을 임 시로 만들었다. 피아노는 4대가 전부였다. 이마저 미국감리교 여선교회에서 모금 을 해 오랫동안 사용한 피아노를 배편으로 보내온 것이다. 1회 입학생은 25명으 로 대부분은 피아노 전공이었다. 성악 전공자를 위한 피아노가 없어 피아노를 차 지하느라 매일 전쟁을 해야만 했다. 감리교신학대학 음악교육과는 그가 대학 3학 년 때 교명을 목원대학으로 바꿨고, 4학년 때 음악관 신축건물이 들어섰다. 4년째 에 강의실, 감상실, 레슨실, 콘서홀 등 음악대학의 꼴을 갖췄다. 대학에서 주로 피 아노와 성악을 공부했다. 성악 음역 파트는 테너였다.

“조길자 교수님이 전공 실기 지도교수였는데 자연스럽게 높은 소리 테 너 파트를 배정받았어요.”

소속된 교회에서는 성가대 지휘, 교인 찬송 지도를 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아 나운서의 꿈은 여전했다. 때마침 기회가 왔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3년 KBS에서 1기 아나운서를 뽑는 공고를 접했다. 대학 체육대회 행사 때마다 스포츠 중계를 하던 실력과 열정으로 지원했다.

“뉴스 대본을 읽는 카메라 테스트를 했는데 1차 합격인 거예요. 바로 바로 명단이 붙어요. 2차 카메라 테스트는 전후좌우 다 찍더라고요. 그런데 측면 카메라에서 X가 두 개 나온 거예요. 좌우 측면에서…. 불 합격 명단이 붙더라고.”

17쪽

대학교 졸업사진

18쪽

대학생 부부 그리고 첫 부임한 공주영명고등학고

아나운서의 꿈을 내려놓았다. 대학 시절 중 빼놓을 수 없는 삶의 변화는 결혼식이 다. 1972년 2월 대전현대예식원에서 식을 올렸다, 학생 부부였다. 그가 대학교 3 학년(25), 부인(송정빈)은 2학년(22)이었다. 졸업 후 공주 영명고등학교에서 첫 교 사 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이었는데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음악 교사의 꿈이 이루어 지는 사건이니까요. 학교 또한 오랜 역사를 가진 감리교 재단의 남자 인문계 학교였습니다. 이때 제가 도움을 준 제자 중 한 명이 이후 목원 대 총장을 역임했어요.”

이후 남대전고에서 한 학기를 근무했다. 군 복무는 2대 독자로 6개월간 대전 동구 신흥동 동사무소 예비군 중대에서 파견근무를 했다. 제대 후 대전 청란여중 음악 교사로 2년간 재직했다. 그러다 사표를 내고 경희대 음악과 예술대학원에 입학했 다.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거 안 되겠다’ 다른 세상을 본 거예요. 내가 만족을 못 해서..(대학 원) 시험 준비를 해야겠다 … ”

경희대대학원 졸업 후 호수돈 여고 음악교사로

대학원에서 서수준(성악 실기), 김동진(작곡), 김세영(화상악), 이성삼(음악사) 교수

19쪽

호수돈여고 교사시절

20쪽

2002년 <독창회> 팜플렛. 1979년 첫 독창회를 시작해 2014년까지 독창회를 했다.

21쪽

와 만났다. 이원설 당시 대학원 원장도 잊지 못한다. 조교 일자리를 주선하고 아파 트 숙소도 제공했다. 음대학장은 임원식이었고, 합창 지휘 교수는 정명소 박사였 다. 이성삼 교수는 양기철 대학원생을 볼 때마다 ‘교수과정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대학원을 졸업 후 호수돈여고 음악 교사로 11년 10개월을 근무했다. 배재대, 목 원대, 충남대에 강사로 출강해 성악 실기나 음악 가창, 음악의 이해를 가르쳤다. 독창회 등 발표 활동도 꾸준히 했다. 1979년 6월 대전가톨릭문화회관 대강당에 서 가진 첫 독창회를 시작으로 2014년 11월까지 9차례의 독창회를 개최했다.

[독창회 연혁] 제1회 테너 양기철 독창회 1979.6.5. 대전가톨릭문화회관 대강당 주최 : 경희대학교 대학원 음악과, 후원 : 목원대학교 음악과 동문회 제2회 칸초네와 우리가곡의 향연 대전시민회관 대강당 주최 : 한국음악협회 충남지부, 후원 : 대전문화방송주식회사 제3회 테너 양기철 독창회 1988.5.14. 대전시민회관 대강당 주최 : 한국음악협회 충남지부, 후원: 대전문화방송주식회사 제4회 바리톤 양기철 독창회 1994.12.1. 예산군 문예회관

22쪽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제5회 바리톤 양기철 독창회 1994.12.5. 대전가톨릭문회회관 제6회 바리톤 양기철 독창회 2009.5.26. 당진문예의전당 대공연장 제7회 바리톤 양기철 독창회 2002.11.28. 신성대학교 대강당 주최 : 신성대학, 후원 : 신성대학 총동문회. 음악협회 당진군지부 제8회 정년퇴임 기념 양기철 독창회 2014.11.2. 당진문예의전당 대공연장 제9회 정년퇴임 기념 양기철 독창회 2014.11.2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집 3층 다목적 홀 주최:충청오페라단

독창회 연혁을 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테너 독창회’를 하다 1994년 12월 독창회 때부터 ‘바리톤’으로 음역이 바뀌었다. 테너는 높은음으로 강하고 화려하 지만 바리톤은 부드럽고 은근함, 달콤함이 특징이다.

그는 1992년 7월과 8월 이태리 로마 아카데미 과정, 1995년 이태리 로마 벨칸토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에는 이태리 아퀼라 국립음악원 여름 아카데

미 과정을 수료한 후 디플로마(Diploma)를 획득했다.

23쪽

“이태리 산타시실리아 음악원에서 만난 교수님들이 제 노래를 듣더니 바리톤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태리는 음역을 확정할 때 이비인후 과 진료 결과를 참고하는 데 진료 결과도 바리톤으로 나왔어요. 내시 경으로 성대의 길이를 측정했죠. 성대 구조상 음역이 바리톤에 해당한 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이때부터 연주곡을 바리톤으로 바꾸기 시작했어요. 2002년 차이콥스키 여름 캠프에서 만난 표트르 교수(차 이콥스키 세계 콩쿠르 심사위원, 테너 교수)도 ‘당신은 바리톤 음역이 다’고 재확인해 주셨죠.”

그가 11년 10개월을 근무했던 호수돈여고의 강당은 대전 최고의 음악관이었다. 가장 시설이 좋았다. 한동일, 백건우와 같은 이름 있는 음악가들이 모두 호수돈여 고 강당에서 음악회를 했다. 호수돈여고 합창단이 합창을 잘해 음악 하면 호수돈 여고, 음악회 하면 호수돈여고 강당이었다. 이후 대전시민회관, 우송예술회관, 엑 스포 아트홀, 대전예술의전당 등이 건립되면서 공연장도 점차 중심이 이동했다.

<충청오페라단> 창단. 오페라의 매력에 푹 빠졌다

1989년 11월이었다. 대전시민회관에서 <오페라 하이라이트> 공연이 열렸다. 대 전 성악가 20명과 대전여성합창단 40명이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대전음악인 에게 오페라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됐다.

대전에서 오페라가 주목받게 된 이유는 또 있었다. 오페라는 문학, 피아노, 성악, 합창, 작곡, 관현악, 관악, 현악, 무용 등이 참여하는 종합예술이다. 1970년, 목원

24쪽

대에 처음 음악과가 설립된 이후 공주사범대, 배재대, 침례신학대학 등에 관련 학 과가 들어섰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자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음악 활동이 이 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도 오페라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무대 위에서 성악, 춤, 연기 이런 것들이 다 어 울 어지니까. 관객의 감동이 전연 새로운 거예요, 오페라를 맛보고 나 면 다른 음악회를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요. 그만큼 오페라를 보 는 묘미가 있어요.”

처음 충청오페라단 창단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재정적자가 생기 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단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생 각해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대개 서울 수도권 중심이고 17개 시도 지역에는 1, 2개 단체가 민간으로 창단되던 때였다. 충청오페라단은 서울을 빼면 지역에서 8 번째 창단이었다.

이듬해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동안 대전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막을 올린 마스카니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다. 전석 매 진의 기록을 남겼다. 관객들은 감탄사를 쏟아냈다.

이 작품은 여러 에피소드도 남겼다. 창단 공연 당시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장소가 없어 극장 1층 앞 의자를 뜯어내고 나무로 틀을 잡아 광목을 둘렀다. 당시 이봉학 대전 시장은 나흘 동안 공연장 로비에서 리셥션을 베풀었다. 대전 KBS는 1991년 12월 28-29 자체 제작비를 들여 ‘91송년오페라공연’으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

나> 창단공연작품을 3회 무료공연하고 TV 방영까지 했다.

25쪽

충청오페라단이 창립하자 대전오페라단(대전음악협회), 성곡오페라단(단장 백기 현 교수)이 결성돼 3개의 오페라단이 경쟁하듯 활동했다.

충청오페라단은 해마다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91년에는 제2회 공연 작품인 <돈 조반니>(대전시민회관 대강당), 제3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대전시민회관 대 강당)를, 92년에는 제4회 <라트라비아타>(대전시민회관 대강당)를 무대에 올렸다. 이듬해인 제5회 1993년에는 <춘향전>(7일간 대덕과학문화센터, 대전시민회관 대 강당)을 선보였다. 제6회에는 <루치아>(1994, 우송예술회관), 제7회 <사랑의 묘 약>(1995, 엑스포아트홀), 제8회 <리골레토>(1996, 대전시민회관), 제9회 <여자 는 다 그런 거야>(2000, 서산시문화회관), 2001년에는 제10회 창작 오페라 <솔 뫼>를 각각 충남대학교 대강당, 충남 합덕 서야고등학교, 해미읍성 야외무대에서 선보였다.

왕성한 창작 공연 … 난관은 공연 적자였다

곡절과 난관도 많았다. 오페라 한편을 올리는데 2억 원에서 3억 원의 경비가 필 요했다. 문예진흥기금 20%, 후원인 후원금 5%, 티켓 판매대금 20%를 뺀 나머지 60%가 단장의 개인 출연금이었다. 공연할 때마다 연금공단 대출금 등 8,000만 원 정도의 적자가 생겼다.

□대학 교수로 일찌감치 임용될 기회도 뜻하지 않게 무산됐다. 1992년, □대학에 서 가을학기부터 전임 교수로 초빙을 약속했다. 호수돈여고에 사표를 내라고 권 유까지 했다. 임용에 필요한 서류도 다 제출했다. 갑자기 □대학 이사장실에서 연 락이 왔다. ‘교수공채 했던 것을 보류하게 됐다’고 했다. 모 관료의 요청으로 그 관

26쪽

충청오페라단 창단연주

27쪽

료의 일가가 그 자리에 임용됐다.

“할 말이 없더라고요. 제가 안 된다고 한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고 그 래서 (인생의) 고비를 한 번 앓았네요. 거기서.“

특히 1992년 호수돈여고 교사직을 사직하면서 찾아온 어려움이 컸다. 퇴직금으 로 <대전예술단> 사무실과 <대전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마련했지만 1년 만 에 부도가 났다. 1995년 공연 활동을 못한 이유다.

“종은 쳤는데. 무대막이 안 올라가. 뒤에 가봤더니 플레이어들에게 다 지급하고 1인당 3만 원씩을 미지급했거든요. 모든 것은 선지급을 해야 무대가 올라가요. 미지급했던 걸 줘야 막을 열고 연주를 한다는 거예 요. 쓰러질 거 같았어요. 진짜. 머리끝이 하늘로 솟더라고요.”

1996년 이후 4년 동안 같은 이유로 활동이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될 때마 다 ‘오페라공연을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다가도 다음 해에 다시 공연을 추진했다. 오페라의 마약 같은 매력 때문이었다.

“태평동 지하에다가 <대전심포니오케스트라> 연습실을 만들어서 3년 했다니까요. <대전 예술단>이라는 거를 만들어가지고 대전 시내에서 그걸 만들어서 대전에서 <대전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런 거까지 했어 요. 대전시에서 엑스포 아트홀을 줬어요. 시에서. 거기 지하에 연습 실 사무실을 줬어요. 그렇게 하다가 퇴직금 다 까먹고 다 정리하고 … ”

28쪽

가족이 뭉쳐 위기를 넘다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힘을 준 사람은 가족이었다. 창단 이후 부인 송정빈 여사 는 홍보실장을 맡아 일을 도왔다. 큰아들(재천)은 기획실장, 작은아들(태호)은 공 연 팀장을 맡아 봉사했다.

“가족들의 도움 없이 매달 보수를 지급하는 직원 구조였다면 10년도 못 넘기고 문을 닫았을 겁니다.”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재천은 첼리스트고, 딸 은영은 피아노 학과 를 나왔다. 차남 태호는 무역을 전공, 현재 관련 일을 하고 있다. 1996년 3월 고 향에 있는 당시 신성전문대학 유아교육과 음악 담당 교수로 발령받아 다시 활동 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전석 매진 감동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그에게 오페라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다. 그 는 “대전 시립합창단과 합창, 대전시립오케스트라 등 대전시립예술단과 대전음 악인들과 만든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평가한다. <솔뫼> 또한 잊지 못할 작품이 다. <솔뫼>는 한국 최초 사제이신 성 김대건 신부가 출생한 성지다.

“고향인 당진 신성대학에 부임하고 31번째 솔뫼 성지를 방문한 날, 동상 앞에서 기도하며 결심했어요.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29쪽

충청오페라단 2회 공연

30쪽

충청오페라단은 1989년 11월 창단한 이후 10편의 오페라를 제작하고 최근까지 연주회와 일반연주회 등 총 200회 가까운 공연을 했다. 특히 오페라의 경우 일반 인에게 어렵지 않도록 번역해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충청오페라단 오페라 제작 공연 연혁]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1990, 대전시민회관 - 돈죠바니 / 1991, 대전시민회관 - 라트라비아타/ 1992,대전시민회관 - 춘향전 / 1993, 대덕과학문화센터, 대전시민회관 - 루치아 / 1994, 우송예술회관 - 사랑의 묘약 / 1995, 엑스포아트홀 - 리골레토 / 1996, 대전시민회관 - 여자는 다 그런 거야 / 2000,서산시문화회관 - 솔뫼, 성 김대건 신부’ / 2000,2001 충남대학교대강당, 합덕 서야고등학교,해미읍성 - 안드레아 / 2015, 당진문예의전당

작은 음악 도시 꿈꾸며 지역문화예술 활동으로

신성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문화예술 분야로 눈을 돌렸다. 고향 당진을 ‘음악

이 있는 작은 도시로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도 생겼다.

31쪽

“고향에 뼈를 묻겠다는 마음으로 고향으로 왔어요. 유아교육 교사들을 육성하는 학과이기에 유아 음악교육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생활 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는 다짐이었죠.”

뮤지컬 예산 의종은 형제 이야기인 <굿 브러더스>, <별주부전>, <칠갑산 장승>, <태안 마애삼존불>, <성벽은 살아있다>, 심훈의 <상록수> 등 작품은 이런 배경으 로 탄생했다. 충남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 문학작품을 소재로 창작 뮤지컬을 시 도한 것이다.

이중 <굿 브라더스>는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예산에서 초연 후 관객들이 인터넷 에 올려주기까지 했다. 태안 남면 원청리 용새골 전설을 소재로 한 <별주부전>은 충남도에서 우수공연작으로 선정, 충남지역 순회공연까지 했다. 이는 원청리 마을 이 ‘별주부정보화마을’로 지정되는 계기가 됐다.

“지역민들이 애착을 가지는 데다 작품 내용을 잘 알고 있어 감동은 물 론 재미와 자부심까지 심어줬죠. 동네 이야기와 인물도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어요.”

지역 문화단체 활동도 벌였다. 한국음악협회 충남지부 사무장과 이사, 충청문화예 술진흥회 법인이사, 충남도 도민참여 예산위원회 문화복지분과 위원장, (재단법인) 당진문화재단 초대 이사, 당진군 예술진흥 정책 자문 교수 부회장, 당진군립예술단 예술 총감독 및 상임 지휘자, 사단법인 한국예총 당진군지부장, 사단법인 한국음악 협회 당진군지부장, 충남도 정책자문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분과 위원을 역임했다.

32쪽

충청오페라단 오페라 공연 연혁 1

34쪽

2020 충남원로예술인 구술채록집

양기철

성악가

구술 조사 채록연구 사진 디자인

발행일 발행처

ISBN 979-11-966078-5-2

양기철 심규상, 윤형권 심규상 심규상, 윤형권, 양기철 (제공) 김상아

기획 최종길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이사장) 제작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2020년 11월 27일 (대표이사 김현식) (우)32263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상하천로 58 3층 전화 : 041-630-2900 https://www.cacf.or.kr

이 책은 비매품입니다. 저작권은 충남문화재단에 있으며,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 또는 전 부를 무단 복제, 전재, 발췌하는 것은 금합니다.

글이 없거나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쪽은 뺐습니다. 이북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