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동 구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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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이 책은 당진문화재단의 2020 당진문화예술인기록사업 일환으로 제작되 었습니다.
2. 이 책은 구술 채록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독자가 읽을 때 난해하지 않을 범위 안에서 구어체, 사투리 등을 살려 생동감을 전달하고 자 하였습니다.
2-1. 본문에서 ‘전사본’은 처음 구술문을 그대로 채록한 초본을 말합니다. 본문 에 전체 들여쓰기한 것이 ‘전사본’입니다.
2-2. 원 전사본은 질문과 답이 있는 대담 형태였으나, 독백의 형식으로 다시 엮었습니다. 가급적 질문만 삭제하는 수준에서 편집하여 구술의 현장성 을 존중했습니다. 다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부분에만 ()안에 조사자의 말을 넣었습니다.
2-3. 구술의 시차가 있는 경우, 전사본과 전사본 사이에 한 줄 띄어쓰기하였습 니다.
3. 구술 채록 선정자는 ‘구술자’로 채록 시 질문 및 면담을 담당했던 연구자는 ‘조사자’로 통일했습니다.
4. 본문은 저자의 시선에서 독자에게 구술자의 생애사를 전달하는 스토리텔 링 형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가급적 전사본에 충실하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저자의 해설과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5. 구술자의 구술 내용은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최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다만, 사진 자료의 연도, 개인의 생활사 등 일부 확인되 지 않은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6. 부록으로 참고문헌을 수록하였습니다. 각주에는 구술자의 작품 중 전부 혹은 일부를 인용, 발췌한 것에 대한 출처와 함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
구술 조사 일시 : 2020년 9월 10일 ~ 11월 2일 장소 :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한 저자의 덧붙이는 말도 수록하였습니다.
글 싣는 순서
일러두기
Ⅰ. 이우영 선생을 만나다 능성구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모범생 자동이 이우영 선생을 만나다
Ⅱ. 청년 구자동, 기지시줄다리기를 알다 약업사를 꿈꾸며, 대동약방에서 일등 신랑감, 약방 청년 결혼하다 초대 보유자 이우영과 기지시줄다리기 구자동, 기지시줄다리기를 알다 - 충남도 민속문화재 제35호 지정까지
Ⅲ.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 구술 70년대 기지시줄다리기와 기지시장 기지시줄다리기의 첫 번째 화려한 외출 그 후 - 국풍 81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기지시장 상인 중심에서 주민 중심으로 - 1980년대 기지시줄다리기
Ⅳ. 기지시줄다리기와 사람들 인간문화재 지정과 그에 따른 어려움 무형문화재의 생명줄, 전승자에 대한 목마름 故장기천 보유자와 보존회 사람들
Ⅴ. 기지시줄다리기의 세계화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개관 해외에 나간 ‘기지시줄다리기’ - 일본 가리와노 줄다리기 교류를 중심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다
Ⅵ. 기지시줄다리기와 구자동의 삶 “줄은 몸이며 행동이고 민중” - 줄다리기의 의미에 대하여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 후회도, 걱정도 없다”
* 구자동이 걸어온 길 * 참고한 문헌과 언론 보도
능성구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모범생 자동이
Ⅰ
이우영 선생을 만나다
이우영 선생을 만나다
능성구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모범생 자동이
1943년 11월달에 신암사 밑에 전통적으로 능성구씨 집성촌이여. 거기에서 아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 식구는 10명이 넘 는데 논 서 마지기 가지고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 서 태어났는데. 내가 오남매 중에 아들로는 셋째야. 형님들이나 누 님들 초등학교도 졸업 못 했어. 그래도 동네에서는 인정을 받고 착 하고 똑똑하고 인사성 바르다고 소문이 나가지고서. 초등학교 다 닐 때 그래도 자동이는 중학교를 보내야 겠다, 해가지고 형님들이 자기들이 다니지 못한 중학교까지 보냈어.
어린 시절 구자동은 모난 곳 없이 순한 아이였다. 형제 많고 가난한 집안에 셋째
장조카 구본행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구자동(맨오른쪽)과 가족들. 집안에서 두 사람이나 고등학교를 보내기 어려 웠던 시절. 구자동의 큰형님(자흥, 왼쪽에서 두 번째)은 그를 고등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자 했지만, 구자동은 장 조카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대동약방에 취업했다. 그는 성실히 공부하여 서울대를 졸업한 장조카가 늘 대견스럽다.
아들이었지만, 어느 하나 비뚤어진 구석이 없었다. 말썽 피워 혼난 기억이 없는 이 유는 형님들 덕이었다.
귀염받고 자랐지. 글쎄 성실, 근면 그런 거는 부모님 피를 많이 받 았다고 봐야지. 우리 형님들이 다 착했어. 그걸 다 받은 거지. 동 네가 능성구씨 아주 못자리판이기 때문에. 신암사 아래 산지기분 이 사셨어. 옛날에는 그분들이 애들만 만나도 도련님, 도련님 하던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 같으면 꿈같은 이야기지.
큰형님은 지금 살아계시면 아흔둘이시고 (나하고)나이 차이가 많 지. 그때는 조그만 촌에 그 사람들이 많았잖아. 보통 오륙남매, 십 남매 그랬지. 그래도 자동이 만큼은 공부시켜야 겠다, 했는가봐.
구자동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녔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10살이 되어서야 기지시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대, 한국 전쟁과 당시의 농촌 생활상을 고려하면 9년 개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 면 구자동은 모범생이었다.
비 오는 날 있잖아? 홍수가 나잖아, (학교 가는 길목에)큰 냇가 가 두 개가 있었는데 동네 학생들을 내가 다 엎어서 건너서 데리 고 다녔어. 9년 동안 개근을 하고 초등학교 2학년부터 일기를 썼 어. 근데 그 일기를 보관을 잘 했어야 하는데 군대 갔다 오니까 옛 날에 화장실에 휴지가 없잖아. 어느 날 집에 와서 보니께 일기장
구자동의 초등학교 3학년 당시 받은 상장. 그는 학창시절 개근상을 빼놓지 않고 받은 것은 물론 학업상, 근면성실 상 등을 다수 수상했던, 말 그대로 모범생이었다.
이 화장실에 있는 거야. 착실했었어. 공부도 뭐 1, 2, 3등을 놓치 지 않았었어.
능성구씨 집성촌이었던 가교리를 떠난 건, 구자동이 중학교를 막 졸업한 1961년 이었다.
근근이 가교리 살다가 순성면 중방리라는 곳으로 논 서 마지기 팔 아가지고 논 여섯 마지기 사느라고 이사를 갔어. 논 늘리느라고. (당시 나이가) 중학교 막 졸업하고 61년도. 1년 동안 나도 농사를 지었어. 61년도 5.16 혁명이 일어날 때여. 5.16 혁명 공약 낭독을 하고, 라디오 틀면 그런 것들이 흘러나오고 그럴 때. 이우영 선생 님이 우리 형님을 통해가지고 자네 동생 자동이 걔 뭐하나, 집에 있다 그러니께 약방에 좀 보내라고. 그래가지고서 그때 (기지시리 에)온 거여.
이우영 선생을 만나다
중학교를 졸업한 구자동은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했다. 없는 형편 에 자신의 학비까지 부담하고 있는 형들에게 더 기대어 살 수 없다, 생각했다. 마 침 6살 아래 장조카도 공부를 썩 잘했다. 장조카가 자신은 공부하지 않아도 삼촌( 구자동)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고사했다. 한 집안에서 둘이나 고등학교 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빨리 내 밥벌이는 내가 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 러던 와중에 이우영 선생이 그를 찾아왔다.
당시 내 생각은 무슨 생각이었냐면 하루빨리 내 자립으로 내 생활 을 해야겠다. 집안이 가난하고 그 뭐하니까. 형님들이 나를 돌봐 주는 어려움에서 벗어나야겠다. 이미 형님들은 결혼해서 다 모여
살았으니까. (중략) 우리 큰형님이 이우영 선생님 처가 사촌 처남 이여. 그 관계로 나를 잘 알지. 내 이야기를 자주 듣고 하시니까 좀 데려오라고 해서 간 거지. (그때 기회라고 생각하셨겠어요) 아 차, 여기 가야겠다. 나는 처음부터 이걸 해야 겠다, 마음먹고 갔으 니까. 내가 살 길이다.
1)
이우영은 기지시장에서 대동약방 을 운영하던 한약사였다. 1970년대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기지시줄다리기를 전승, 보존하는 데 기여한 이우영은 기지시줄다리 기의 첫 인간문화재이기도 하다. 이우영과 만남은 구자동이 평생토록 기지시줄다 리기를 지키는 삶을 살 게 된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 당시 이우영 선생님이 양약, 한약을 같이 하고 계셨는데 손이 많이 딸렸지. 아 61년 5월에 와가지고 군대 가기 전까지 착실하게 일을 했어. 제대는 68년도에 했는데 제대하기 전부터 나를 다시 데려오려고 애를 쓰시고. 나는 이제 서울로 가야겠다, 다른 직장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분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우리 집 순성에 오셨더라고. 자네 그동안, 군대 가기 전에도 와서 애써줬는 데 와서 일을 해줘야 겄다. 그때만 해도 의서가 있었나 뭐. 양약 한약뭐다 설명서 이런 거 이만큼씩 쌓아놓고서 공부를 하는 거여. 한약공부까지 해가지고 지역에서 유명한 한약업사가 되어야겠다 는 포부를 가지고 저녁마다 매일같이 공부를 했었지.
1) 현재 송악읍 보건소 앞에 위치.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운영된 약방으로 1990년 기지시줄다리기 전수회관이 건립되기 전 까지, 기지시줄다리기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이우영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꼬박 40년간 이어졌다.
그 당시에는 한약업사 시험이 없었어. 시험을 볼 기회가 없었어. 그래가지고서 이우영 선생님이 지역에서 그렇게 약방이 잘 되고 그러니까 지역에 봉사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또 이것저것 사업을 많이 벌였었어. 약방만 한 게 아니라 주유소도 해가지고, 주유소 그때 하려면 위험물 취급면허가 있었어. 그것도 2년 동안 공부해 가지고 내가, 대전 그때는 충청남도 경찰국, 거기 가서 시험을 봤 어. 70년대. 그것도 했었고. 거기서 시험 봐서 합격해서 기지시주 유소 면허를 따면서 주유소 차려가지고서. 그 분 돈으로 다 한 거 지. 나는 이것저것 집사 역할만 한 거여.
군을 제대하고 한 번, 그 이후 또 한 번 대동약방을 떠나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구자동은 그곳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물론 고심하지 않 은 것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성실함과 능력에 자신도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지시장 대동약방에 묶은 건, 이우영의 ‘신뢰’였다.
중간에 제약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한번 들어왔었어. 이우영 선 생님한테 제의가 들어왔는데 갔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했 더니 한마디로 나 밥 먹게 되면 자네 밥 먹게 시켜주고 나 죽 먹게 되 면 죽 먹게 시켜줄 테니까 어려워도 같이 있자, 그래가지고 거기서 또 한 번 신임을 하시더라고. 그래서 뿌리칠 수가 없어서 안 갔지.
구자동은 고 이우영 선생이 주유소를 개업하기 위해 필요했던 위험물취급주임자격증 시험에 응시해, 면허를 득했 다. 그는 대동약방은 물론 이우영 선생의 다양한 사업과 사회활동의 실무를 맡아왔다.
신뢰. 그것이 첫째였지. 처음부터 나를 아주 100% 신뢰한다는 믿 음을 줬기 때문에 나도 그분을 배반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 틀리 는 게 있으면 상의하고 건의하고 했지.
청년 구자동, 기지시줄다리기를 알다
Ⅱ
약업사를 꿈꾸며, 대동약방에서 일등 신랑감, 약방 청년 결혼하다 초대 보유자 이우영과 기지시줄다리기 구자동, 기지시줄다리기를 알다 - 충남도 민속문화재 제35호 지정까지
약업사를 꿈꾸며, 대동약방에서
지역 유지였던 어른이 보여준 자신에 대한 신뢰는 어린 구자동에게 큰 힘이 되었 다. 이우영의 신뢰를 바탕으로 구자동은 약방 일을 배우는 데에 몰두했다. 약업사 가 되어야겠다, 마음먹으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알게 됐다. 약방이 문을 닫으면 밤늦도록 약을 공부했다. 마땅히 공부할 전문 서 적이 없어 무조건 약에 동봉된 설명서를 외웠다.
이우영 선생님이 진찰하잖아. 진맥을 해가지고 한문으로 이렇게 처방하 잖아. 처방지를 내주시면 약은 내가 다 짓지. 약 조제 뭐 이런 거 그때 약 업사 시험이 있었으면 뭐 했을 텐데. 시험이 없었어. 처음엔 청소부터 했 고 나는 처음부터 이걸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갔으니까. 내가 살 길이다.
구자동의 군대 시절 신분증과 사진들
II 청년 구자동, 기지시줄다리기를 알다
양약은 설명서가 있어. 그걸 이만큼씩 쌓아 놓고서라믄 무조건 읽고 외우 고 성분 익히고.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이 없잖아, 무슨 책이 있어. 한 약이라고 방약합편밖에 더 있어? 성분이 뭔지 그런 거 덜덜덜 외웠었지.
경험이 무섭다고, 군 복무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발뒤꿈치가 통일화에 까져가지고 동상에 걸려서 3개월 동안 논산 육군병원에 입원을 했었어. 근데 한 달도 안 되어가지고 다 나았 는데 약방에 있었기 때문에 약에 대한 상식이 있으니까 위생병들 이 나보다 못하잖아. 그러니까 거기서 인정을 받아 가지고 2개월 을 더 있었어. 안 보내줘 가지고. 같이 일하면 재밌잖아. 저들이 할 일 내가 다해주고 그러니까. 그때 주사 놓는 법을 거기서 배웠 어. 혈관주사, 근육주사, 상처 치료. 잘하지, 지금도 잘 혀. 혈관 주사 잘 놔, 나. 그라고서 제대하고 왔는데 동네 사람들이 주사를 놔 달라는 거여. 혈관주사를 의사보다 더 많이 다니면서 주사 놨 어. 지금 같으면 징역 갈 일인디. 그리고 그때는 결핵이 많아가지 고서 SM 스트렙토 마이싱 주사라고 많이 맞았어. 지금 기지시 폐 병 환자들이 많았었어. 그 사람들 내가 거의 다 놔주고. 지금도 약 사라고 혀. 이우영 선생님 아들, 딸들은 구약사님, 구약사님 그려.
구자동 인간문화재
구술 조사 채록연구 사진 발행 총괄 기획 디자인 및 인쇄 문성기획 발행일
03 당진문화예술인 구술채록사업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줄다리기 보유자
구자동 우현선 우현선 김형태, 구자동, (사)기지시줄다리기보존회 당진문화재단(이사장 김규환) 김이석(당진문화재단 사무총장)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이사장 최종길)
2020년 11월 27일
(우)31774 충청남도 당진시 무수동 2길 25-21 http://www.dangjinart.kr ISBN 979-11-966078-4-5 [당진문화예술인구술채록집] 이 책은 비매품입니다. 저작권은 당진문화재단에 있으며,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내용의 일부나 전부를 인용, 발췌하는 것은 금합니다. [Dangjin Cultural Artist Oral Collection] Not for sale. All rights reserved in cluding the rights of reproduction in whole or in part in any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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