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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호 구술집

이북 원문에서 글자만 옮긴 전체 텍스트입니다. 표·그림·사진과 원래 모양은 이북에서 확인하세요.

6쪽

일러두기

1. 이 책은 당진문화재단의 「2019 당진문화예술인기록사업」 일환으로 제작되 었습니다.

2. 이 책은 구술 채록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독자가 읽을 때 난해하지 않을 범위 안에서 구어체, 사투리 등을 살려 현장성을 전달하고 자 하였습니다.

2-1. 본문에서 ‘전사본’은 처음 구술문을 그대로 채록한 초본을 말합니다. 본문 에 전체 들여쓰기 한 것이 ‘전사본’입니다.

2-2. 원 전사본은 질문과 답이 있는 대담 형태였으나, 독백의 형식으로 다시 엮 었습니다. 질문(고딕체)은 구술자의 생애사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 형식 으로 연구자의 해설을 덧붙여 재구성하였습니다.

2-3. 구술의 시간차가 있는 경우, 전사본과 전사본 사이에 한줄 띄어쓰기 하였 습니다.

7쪽

3. 구술 채록 선정자는 ‘구술자’로 채록 시 질문 및 면담을 담당했던 연구자는 ‘조사자’로 통일했습니다.

4. 구술자의 구술 내용은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최대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 여 정리하였습니다. 다만, 사진 자료의 연도, 개인의 생활사 등 일부 확인 되지 않은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6. 부록으로 참고문헌을 수록하였습니다. 각주에는 구술자의 작품 중 전부 혹은 일부를 인용, 발췌한 것에 대한 출처와 함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

구술 조사 일시 : 2019년 6월 23일 ~ 11월 16일 장소 : 아미미술관 박기호의 작업실

한 연구자의 덧붙이는 말도 수록하였습니다.

8쪽

글 싣는 순서

일러두기

1 . 첫 스승과 첫 사랑 채운리 243번지 선생님, 나의 선생님 1 첫사랑, 그 아이

2 . 고향을 떠나다 공간의 의미 선생님, 나의 선생님 2 광화문화실 군에서 그린 그림

3 . 프랑스에 가다 <골목-83> 세계일주와 파리 유학 어느 대가의 아뜰리에

9쪽

4 . 미술관을 열다 결혼과 다시 찾은 고향 폐교에서 작품을 고르는 기준

5 . 다시, 고향에서 당진미술협회 창립 20세기, 당진 미술 미술과 교육 청소년 미술 아카데미

6 . 여행의 힘 채운뜰에서 동남아까지 예술가와 장인, 미술관 밖으로 나온 그림

7 . 작품세계 초창기 유학기 중년기 그리고 지금

참고한 문헌과 언론보도 박기호가 걸어온 길

11쪽

첫 스승과 첫 사랑

채운리 243번지 선생님, 나의 선생님 1 첫사랑, 그 아이

13쪽

하고 그랬는데.

나 어릴 때, 채운뜰에 십자골망이란 데를 지나면 나무다리가 하 나 있었어요. 굉장히 예쁜 다리였어. 나는 솔직히 공부보다도 학 교만 갔다 오면 가방 집어던지고 거기로 넘어갔어요. 나무 한 그 루, 정자나무가 있었어요, 뜰 안에. 바로 그 나무 옆이 우리 논이 었지. 그때 생각에는 작았는데 지금 가보니까 구불치듯 고목이더 라고. 맨날 거기 가서 놀았어요. 학교 갔다 오면 새참 심부름도 해야 하잖아. 새참 들고 가다, 막걸리 쪽쪽 빨아먹고, 그래서 취

그 다리를 건너다니다 보면 가끔 물이 들어올 때를 만나요. 그땐 석문방조제를 막지 않았을 때라 바닷물이 신성대 앞까지 들어갔

채운리 243번지

14쪽

박기호는 어린 시절 채운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작품은 그가 채운뜰을 오갈 때 건너다니던 나무다리를 그린 것이다. 지금은 바닷물이 막히고 도로가 놓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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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어요. 거기가 우리 추억의 장소였었어.

옛날 봄에는 나무도 많지 않았어요. 아미산도 나무가 많지 않고 민 둥산이었지. 당진이 거의 다 그랬어요. 그럼 거기에 진달래가 엄청 피었어요. 분홍색으로 진달래가 피면 산을 넘어서 개울도 건너고. 하여튼 공부보다 맨날 논에 가고 산에 가고 그랬죠.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고향 풍경은 이토록 또렷하다. 산마다 진달래가 만발하고 너른 들녘 가운데 홀로 선 나무 그늘이 온 세상을 덮던 어린 시절의 기 억이다. ‘채운리 운곡 243번지’는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첫마디였다. 내가 난 곳의 주소를 정확히 안다는 것, 그건 어떤 의미일까.

채운리 운곡 243번지. 군부대 가기 전 오른쪽으로 보이는 마을. 그 당시에 한 여섯 집이 있었어요. 당숙네 두 집, 마씨네, 오씨 네 … 한 일곱 집쯤 됐나. 거기서 태어났어요. 우리 집은 농사짓는 집안이었잖아요. 아버지는 전매소를 다녔어. 전매소라는 게 옛날 에는 담배 가게가 있으면 다 자전거를 타고, 차가 없으니까 배달 해주고 수금하고 그랬거든. 아버지는 전매소원이셨죠. 그게 부수 적인 직업이고 농사를 엄청 지었어, 저 채운뜰에다가. 그래서 난 채운뜰에 대한 추억이 무지하게 많아. 그땐 농사지을 때 전부 지 게로 날랐잖아요. 우리 집에 머슴이 세 명이 있었는데 그거를 다 지게로 우리집 뒤란까지 날랐어요, 언덕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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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호의 부모는 어린시절부터 그가 그림 그리는 일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예술하면 배고프다’는 이유였다. 그런 탓에 그의 어린시절 그림은 한 점도 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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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는 사라졌으나 ‘머슴’이란 말은 여전히 생활에 남아있던 시절. 1955년1월1 일, 박기호는 채운리 243번지에서 태어났다. 너나할 것 없이 가난하던 시절이었지 만, 어린 기호에게 특별히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다만 아픈 형이 하나 있었다. 자연 히 부모의 온 신경은 형을 향해 있었다. 물론 어린 기호도 형을 사랑했다. 어린 시 절을 돌아볼 때, 가장 행복했던 기억도 형과 단둘이 보낸 시간들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 어린 기호는 형 때문에 외로웠다.

나한테 형님, 누님, 남동생, 여동생이 있어요. 우리 형이 똑똑하 게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신질환을 앓게 돼요. 정신박약이 돼요. 그런데 형도 우리 가족이잖아요. (어릴 땐)엉아라고 불렀어요. 내 바로 위가 형인데 나랑 다섯 살 차이나요. 내가 형을 케어를 해야 했어요. 그래서 겨울에는 농사를 안 지으니까 우리 엉아를 데리고 북창에 글방이 하나 있었어, 서당. 우리 형은 학교를 못가요. 그땐 무슨 특수학교 같은게 있던 시절도 아니고 그래서 학교에서는 안 받아줘. 그러니 우리 엉아를 데리고 글방에 가는 거예요. 겨울에는 눈이 여기(허리)까지 푹푹 빠지는데. 우리 집에서 거까지 엉아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근데 나랑 우리 엉아랑은 너무 행복했어. 막 깔깔깔 웃어가며, 눈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고, 눈 속에서 뒹굴고. 글방에 도착하면 나는 초짜 방에 있고 우리 엉아는 저쪽 방에서 한 문을 배웠어요. 그리고 끝나면 (형을)데리고 집에 오는 게 일이었 어요. 다른 데로 새면 안 되니까. 그런 데에서 내가 장남노릇을 해 가면서 (컸지). 아버지 엄마는 굉장히 괴롭겠지. 식구하나가 그렇 게 되면 … 지금은 (형이) 돌아가셨는데. 그런 집안 사정때문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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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날, 성묘를 마치고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 박기호는 사진 속에서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형이 누구보다도 그립다.

19쪽

아가셨지만.

가)정신적으로 굉장히 외로움이 있었어. 엉아 때문에.

나는 엉아랑 그때가 젤 행복했어요. 우리 엉아니까 원망 같은 건 전혀 없었어. 나는 몰랐어요. 사회에 나와 보니 우리 엉아가 남들 이랑 다르더라고. 나는 나하고 똑같다 생각했는데. 그냥 형이 좀 느리다고만 생각했지. 나는 엉아를 너무 사랑했어요. 지금은 돌

누구도 기호에게 학교가라, 공부해라 잔소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픈 큰 형 돌보 랴, 집안 살림 이끌랴 늘 바쁘셨다. 아버지도 잔정이 없긴 마찬가지셨다. 전형적 이란 말이 진부하게도 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분이셨다. 덕분에 기호는 툭 하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동네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새 끼고양이 마냥, 헤매는 것이 즐거웠다. 집에서 채울 수 없는 것들을 찾아 다녔다. 어린 기호의 눈에 세상 밖은 늘 재밌고 신기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락거렸 던 곳 중에는 외갓집도 있었다. 늘 반겨주던 외가 식구들도 좋았지만, 기호는 무 엇보다 바다가 좋았다.

여름방학이면 외할머니네 가야해. 삼화리예요. KBS 송신탑 바로 앞. 외할머니네 가서 뒤란으로 넘어가면 (지금)석문방조제로 막은 바다였었어. 집에 있으면 맨날 잔심부름 시키고 그러니까 외가에 가면 잘해주잖아요, 외할머니가. 여기(채운 본가)서 걸어가려면 고대로 해서 슬항리를 지나 보덕포로 해서 걸어가는 코스가 있고. 이쪽 석문 쪽으로는 산으로 덕거리로 해서 가는 두 가지 코스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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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항에서>, 1985. 박기호는 당진의 바다를 유난히 사랑한다. 어린시절 외갓집을 오가며 보고 느꼈던 바다의 풍경과 내 음은 그의 중요한 예술적 원천이기도 하다. 그의 오래된 습관이자 취미(?) 중 하나는 새벽녘 트럭을 몰고 당진의 바닷가를 한 바퀴 도는 일이다. 그것은 그의 호기심이기도 하고, 예술가로서의 동력이기도 하다.

21쪽

<휴선>, 1985. 그는 사랑하는 고향, 당진의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그의 작 품 속 장고항 실치배도 이제는 모두 사라진 어선이다. 그는 몇 해 전, 모조리 태워져 버려 사라진 실치배의 마 지막 잔해들을 아미미술관으로 옮겨왔다. 장고항의 역사가 깃든 실치배는 낡고 쓸모없어졌다는 이유로 까맣게 태워졌었다. 하지만 박기호에게 그것은 굉장히 가치있는 작품 소재다. 그는 소중한 역사의 잔해들을 작품으로 승화해 다시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일에 오랫동안 관심을 쏟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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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2010~2014. 4년에 걸쳐 완성한 이 작품은 외가댁 삼화리의 바닷가를 추억하며 그린 것이다. 그 시절 갯벌에는 붉은 함초들이 끝도 없이 돋아났다. 어린 기호는 그 곳을 맨발로 뛰어 다녔더랬다. 그물에 걸린 물 고기를 건지러 가는 외삼촌을 따라 나선 날. 그물코마다 걸린 밴댕이가 얼마나 많던지, 어린 기호의 눈이 부 실 정도였다. 석문방조제로 막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삼화리 갯고랑의 추억은 고스란히 그의 마음과 캔버스 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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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같은 곳이죠.

어요. 여름이면 외갓집 바닷가에서 맨날 노는 거예요.

맨날 학교를 안가고 학교 가는 척하다가 산으로 쏙 빠져요. 진달 래 밭에 가서 도시락도 다 까먹고. 우리 집에서 50미터 떨어진 뒤 쪽에 진달래 밭이 있었어요. 학교 가는 척하다 쏙 들어가면 내 아 지트야. 그 시절엔 가정방문이란 게 있었어. 한 이삼일 학교에 안 가면 가정방문을 와요. 그러면 아부지한테 엄청 혼나고. 그런데도 영, 공부하고는 그렇게 뭐하더라고. 내가 관심이 많은 게 풀하고 꽃하고 바닷가. 어릴 때 그런 데를 혼자 무지하게 해매고 다녔어. 그때 바다의 경험, 민물의 경험, 들에 대한 경험을 모두 했고 그런 데서 감성이 많이 컸던 거 같아요.

나의 고향 당진, 나를 사랑한 당진 사람들. 내가 태어난 당진을 나 는 너무 사랑했어요. 바람소리, 풀 한포기, 새소리, 이름 모를 꽃 들, 시냇물, 바닷가, 샛길까지. 고향의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어 줬어요. 고향은 나를 꼭 껴안고 춥고 배고플 때 나를 보호해 줬어 요. 마음을 넉넉하게 해줬어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 감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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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방앗간은 몇 년 전만해도 박기호의 외가집이 있던 삼화리에 있었다. 채운리에서 삼화리까지 걸어서 외가집을 찾아가 던 어린 기호는 방앗간에서 들려오는 동력기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텅텅텅, 거리는 그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하면, 외가집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라져 가는 고향의 추억들이 가슴 시리게 안타깝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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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나의 선생님 1

어린 짐승 마냥 쏘다니던 그를 자리에 앉힌 건, 그림이었다. 아니 선생님이었다 고 하는 게 맞겠다. 손닿는 대로 그림을 끼적이던 그에게, 어느 날 마주한 선생님 의 모습은 그를 꼼짝없이 묶어 버렸다. 수업이 끝난 교실에 홀로 남은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매일 같이 창가에 매달려 선생님을 훔쳐보았다. 선생님의 그림을 훔쳐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끼적거리기 시작해서 6학년 때 최화진 선 생님을 만나요. 그 전에는 혼자 그리고 그랬는데. 6학년 2반이었 어요, 내가. (교실이)당진초등학교 제일 뒤쪽에 있었어요. 교실 뒤 가 무밭이고 그랬지. 수업 끝나고 가면서 살짝 보니까 선생님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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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서 그림을 그리시는 거야. 선생님은 화가셨어. 발명도 하고 특 허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인데. 몰래 그림을 그리시고 계셨지. 그 때 자화상을 그리고 계시더라고 까만색으로. 그땐 그게 목탄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콩테예요, 그게 콩테였어.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콩닥콩닥.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이후 기호는 선생님 옆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 말하자면 그것이 박기호의 첫

미술수업이었다. 최화진 선생은 그의 마음 속 첫 스승이다.

매일 거기서 들여다보고 있는데 선생님한테 걸렸어. 너 왜 집에 안가고 있냐고 그래서 그냥 선생님 보고 있었다고 하니까 주전자 를 주셔, 막걸리 받아오래. 옛날에 터미널이 어디 있었냐면, 당진 초등학교에서 나오잖아요. 그럼 시장오거리 있잖아요. 시장오거 리에 다리가 있었어요. 복개가 안 되어 가지고 거기 밑에 뽑기며 풀빵장수도 있고. 그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터미널이었어요. 거기 제일연탄이 있었고, 짬보네라고 문방구가 있었고, 양조장도 있었어요. 노란주전자를 가지고 선생님께 막걸리를 받아다 드리 면 너도 한잔 먹어라, 그러셨죠. 그리고는 옆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어요. 잔심부름 하면서. 평상시 에는 (그림 그리면)맨날 때리기만 했잖아요. 손바닥을 많이 맞았 어. 책이 하나도 성한 데가 없어서 다 낙서해가지고. 그땐 받아쓰 기 같은 거 배우잖아요. 근데 맨날 책에다 그림 그리고, 새 책이 사자마자 헌책이 된 거야. 선생님이 하는 건 집중하지 않고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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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제자가 됐다고.

만 한다고 혼나기 일쑤였지. 그런데 (사실은) 선생님 속으로 굉장 히 좋아하신 거야. 내가 낙서처럼 그림 그리는 걸. 제가 결혼식 하기 전에 약혼식 할 때 선생님을 모셨어요. 그랬더 니 막 우시면서 나의 성장과정을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기호는 책 이 하나도 성한데 없이 낙서만 하고 그림만 그리더니 이렇게 훌륭

누구도 어린 기호가 책마다 그려 놓은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그림이란 생 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박기호 자신마저, 그림을 그린다 생각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최화진 선생은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준 사람이자, 기회 를 준 사람이었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 는가. 그 날 이후, 박기호는 ‘그림’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31쪽

02 당진문화예술인 구술총서

박기호 화가

구술 박기호 조사 우현선 채록연구 우현선 사진 인주리, 박기호(제공) 표지그림 최상근 표지글씨 박기호

ISBN 979-11-966078-2-1

총괄 문옥배(당진문화재단 사무처장) 기획 최종길(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이사장) 제작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발행일 2019년 12월 10일 발행인 김규환(당진문화재단 이사장) 발행처 당진문화재단 (우)31774 충청남도 당진시 무수동 2길 25-21 전화 : 041-350-2911 팩스 : 041-352-6896 http://www.dangjinart.kr

이 책은 비매품입니다. 저작권은 당진문화재단에 있으며,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 또는 전부를 무단 복제, 전재, 발췌하는 것은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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