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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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The Sokchoist, The Sokcho-East
목차
여는 글
영감을 마주하는 사람들
이효진 어디에도 속초만한 곳은 없어요 홍현아 똑같은 바다는 없다 김정보 속초 토박이 산악인의 설악산 사랑법
물들이는 사람들
김영건 속초와 서점과 나 이상국 속초에는 이상국 시인이 살고 있다 최윤성 속초씬(Scene)을 그려가는 속초이스트
지키는 사람들
동쪽으로 온 사람들
모래알 나로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돕는 공간, 모래알 오경아 속초가 품은 ‘오경아’라는 이야기
074 086 이 준 밀고(push) 당기며(pull) 더 건강한 속초를 만드는 중입니다 094
김성하 속초의 마지막 자존심, 속초사자놀이를 지키다 김안나 새를 만나면 목신은 마냥 즐겁다 김진호 갯배는 함께 끌고 가는 배입니다 심삼옥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인, 심삼옥
테이블에 올리는 사람들
이상규 속초, 커피 그리고 영랑호 이창복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바다에 나간다
여는 글
속초주의자를 찾아서
더속초이스트(The Sokchoist, The Sokcho-East)라는 이름 짓기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 는 ‘속초부심’을 들춰보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태어난 고장, 혹은 사는 지역에 대 한 자부심이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사는 세상 에서, 지역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들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의자’는 가치관의 영역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속초가 하나의 가치관 이 되어 사람들에게 작동하는 순간들을 잡아채고 싶었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속초사 랑을 끄집어내 동료 시민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어째서 속초를 좋아하게 됐는지, 왜 속 초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거둘 수 없는지 각각의 사연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속초주의자들을 찾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우선 속초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논의하고 이를 삶에서 갈무리하고 있는 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속초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생활환 경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논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오랫동 안 지역에 자리 잡고 이제는 속초의 일부가 된 사람, 속초가 좋아 무작정 이주해 정착한 사 람, 속초에서 태어나 외지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 속초의 산과 바다를 생업으로 삼 은 사람, 속초의 전통과 환경을 지키는 사람, 속초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 등 등 다양한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각자의 삶의 경로가 다른 것처럼 속초를 애정하는 이유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러나 15명의 속초주의자들을 만나며 확인한 것은 이들이 하나같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흘 러나오는 구체적인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주해 온 이들에게 속초는 도전과 모색의 다른 이름이고, 토박이 2세들에게 속초는 부모와 분리할 수 없는 원초적인 환경이 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속초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직까지 낙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빠르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들에 대한 동경만이 가득해 보이는 세상에서, 느긋하면서도 작고 소박한 것들이 갖는 미덕을 속속들 이 보여주는 속초주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반갑고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번 작업을 계기로 더 많은 시민들이 속초에 대한 날것의 애정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기 를 기대합니다.
영감을 마주하는 사람들
이효진 홍현아 김정보
이효진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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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어디에도 속초만한 곳은 없어요
뱃일은 거칠다는 오래된 선입견이 있다. 뱃사람 하면, 어깨에 닻 문신이 새겨진 우락부락한 사내를 떠올리게 되는 식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변화무쌍하고 때론 무섭기까지 한 바다환경이 일견 거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감당해야만 했던 시절에 비하자면 기계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지금은 일 자체가 육체적 힘에 좌우되지 않는다. 수십 년 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21세기하고도 이십여 년이 더 지났다. 이효진 선장과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장사항의 유일한 여성 선장
“어려서부터 계속 보고 가까이서 살았기 때문에 익숙하다는 느낌도 있어요. 그런데, 일단 바다 색깔이 하늘과 겹쳐지는 것을 보게 되면 매번 보는 풍경이라도 멋있어요. 마음 속이 시원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죠.” 하늘과 바다가 포개지는 순간 의 색감은 누구라도 감탄할 만한 빛깔이다. 이효진 선장에게 가장 익숙한 속초의 환경은 누 가 뭐래도 바다다. 바다에서 일을 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었 다. 바다와 관련한 추억을 물었더니 초등학교 시절 선머슴처럼 험하게 놀다 물에 빠져 위 험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부모님께 된통 혼난 이후에 바다에 대한 공포가 새겨졌을 만 도 한데 그렇지는 않았다고. 거기다가 바닷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치명적이라 할 만큼 배 멀미를 심하게 한다. 일을 하기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익숙해지면 차차 나아질 거라 생 각했는데 좋아지지 않더란다. 아마도 매번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먹곤 했던 멀미약에 내성 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바다에 대해 두렵게 생각하게 된 건 일을 한 후 뜻밖의 조난을 당했을 때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혼자 배를 몰고 바다에 나갔는데 기계 고장으로 바다 위 난민이 된 것이다. 물론, 연락을 받고 찾아온 아버지에 의해 1시간 만에 위기는 마무리됐지만 망망대 해 바다에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만만하게 여겼던 바다에 대해 처음으로 두렵게 생각하 게 된 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바다 풍경이다. 물론, 일하 는 사람으로서 매양 보는 광경을 대하는 것은 좀 무덤덤하기도 하다. 생활인의 감각은 글 쓰는 사람의 호들갑을 순식간에 제압해 버린다. 바다 위에서 보는 일출이야말로 장관일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자, 그는 말한다. “뭐, 똑같죠. 눈앞에 걸리는 게 없어서 보기 좋기는 하 지만, 크게 다를 거 없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카누 선수 생활을 했지만, 배를 타보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20대 초반을 보내다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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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특별한 의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기계의 도움을 받는다지만, 기계를 조작하는 사 람이 필요하고 배 위에서 꼭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아무래도 혼자서는 버거울 수밖에 없 는 일. 바다에 나가 일을 할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의 도움을 받은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일을 거들다보니 뱃일이 성격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에게 생 각을 털어놓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는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보자’ 한 마 디만 했을 뿐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일을 시작한지 이제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이십 대 초반부터 아버지에게 일을 배우며 지금껏 배를 함께 타고 있으니 아버지는 직장 상사 이자 동료인 셈이다.
새벽이면 어제 쳐 놓은 그물을 걷으러 가고, 오후에는 다시 그물을 친다. 새벽에는 함께 작 업을 나가는 경우가 많고, 오후에 아버지가 그물을 치러 갔을 때는 주로 그물 손질을 한다. 이효진 선장이 주력하는 것은 그물을 치고 걷는 일보다는 낚싯배 쪽이다. 손님들의 조황에 따라 그 역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손님이 문어라도 낚은 날은 괜히 기분이 좋고, 허 탕을 친 날은 본인 잘못이 아님에도 어쩐지 미안해지는 기분에 안절부절 못한다. 그저 바다 가 부리는 변덕에 좌우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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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l 이효진
가업을 잇는다는 것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속초에서는 부모 세대의 일을 이어서 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가업이 일종의 사명감처럼 여겨지는 일본과는 달리 속초에서의 가업은 어떻 게 보면 임의적이다. 생산 수단을 가진 앞 세대와 아무런 기반이 없는 뒷 세대가 서로 필요 에 의해 성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와 함께 일하는 것에는 어떤 안도감과 불편함이 공존한다. 남이 아닌 가족에게서 일을 배운다는 익숙함과 함께 일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데 서 오는 트러블이 동시에 발생한다. 신구세대간의 갈등은 어디서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기 마련이다.
“가깝고 편한 사람에게 일을 배운다는 건 좋은 일이죠. 근데, 마냥 편하지만은 않아요. 가 끔 서운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보기에는 제가 많이 미흡해 보이고 답답하니까 잔소리를 좀 하시거든요. 세상에 잔소리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저는 저 나름대 로의 방식이 있는 건데, 아무래도 아버지와는 방식이 좀 달라서 약간 다투게 되는 일도 종 종 있죠.”
그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스스로도 살가운 성격이 아 니어서 똑같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녀가 바다에서 보낸 시간은 서 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로 감정이 상해 싸울 때도 있지만, 애초에 뱃일을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고생을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까. 무뚝뚝한 부녀의 살갑지 않은 소통이,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며 서로에 대한 잔잔한 애정과 존중으로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요. 제가 지금은 낚싯배를 주로 운영하고 그물을 치는 일은 안 해봤거 든요.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나중에 아버지가 안계시면 내가 그걸 맡아서 해 야 하는데, 잘 익히지 못한 상황에서는 포기하고 배를 처분할 수도 있잖아요. 저는 포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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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혼자 이걸 한다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되는 게 사실이에 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죠.”
이효진 선장은 속초의 유일한 여성 선장으로 제법 주목을 받았다.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 이 십대 여성은 낯선 존재였을 것이다. 이래저래 입소문이 돌다보니 일을 시작하고 나서 한동 안은 각종 신문과 방송 인터뷰가 끊이지 않았다. 미디어에 보도가 된 날은 친구들이 알아봐 주고 동네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했다. 제법 자부심 넘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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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대 중반에 일을 시작했어요. 일찍 시작한 거죠. 젊은 여성 선장이라는 타이틀이 그 때는 무척 희귀한 일이었어요. 뭐랄까, 그때는 약간의 자부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지 금도 흔하지는 않습니다. 나이대가 약간 어려기지는 했어요. 여자 선장은 모르겠고, 남자들 도 이삼십대 선장들이 종종 보이니까요.”
지금은 스스로 특별하단 생각을 거의 지웠다. 여전히 방송 출연 제의 등이 가끔씩 들어오지 만, 제안이 올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한다고 한다. 하긴 그의 말처럼 여자가 선장인 게 뭐, 특 별할 게 있을까. 어쩌면 이효진 선장의 존재로 인해 누군가는 바닷일을 본격적으로 고민하 는 계기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금 먼저 이 영역에 발을 딛었을 뿐이다.
“남자가 아무래도 힘은 더 세지만 어지간한 건 여자들이 하기에도 무리가 없어요. 제가 힘 에서는 좀 빠질 수 있지만 이제는 배를 모는 게 힘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특히 낚싯배 같은 경우는 포인트를 찾는 게 중요한데 제가 그걸 잘 찾거든요.”
낚시 포인트가 남성과 여성, 나이 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릴 리가 없다. 바다는 그 렇게 옹졸한 곳이 아니니까. 만약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게 되면 아이에게도 이 일을 권해 주거나 같이 해볼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자식에게 권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자부심이 나 상찬보다도 이 일이 괜찮은 일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리라.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엄 마, 나도 배 타는 일 하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과연 그는 말리는 쪽일까, 권장하는 쪽일까.
“따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말릴 생각은 없어요. 일부러 권할 생각도 없지만 말릴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괜찮은 일이니까요. 아이에게 의사가 있다면 아버지가 저를 태우고 일을 알 려주신 것처럼 함께 일 해볼 수도 있겠죠.”
부전여전이다. 언젠가 이효진 선장이 자식에게 선장을 물려주고 뱃전에서 일하는 방식을 두고 자식과 아웅다웅하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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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망치는 건 못 참지
이효진 선장이 생각하는 속초는 무엇보다 자연환경이 빼어나고 음식이 맛있는 곳이다. 산 과 바다, 호수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 양미리 축제나 도루묵 축제 등 겨울의 이색적인 행 사들도 속초만의 매력이다. 그렇다보니, 속초는 관광도시의 숙명을 타고났다. 그가 보기에 설악산과 바다, 청초호와 영랑호 등 자연환경을 제외하고 나면 관광도시로서 속초의 활력 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는 중앙시장이다. 관광객들이 빼곡히 들어차 다양한 먹거리들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은 이제 속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 됐다. 중앙시장이 거 주민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지금의 속초를 이야기할 때 언 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장소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속초에 관광객이 많아지고 개발이 가속화되며 아쉬운 점도 많다. 예전에는 속초의 어디서든 울산바위의 장엄한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고층 아파트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울산바위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되 었다. 그럴 때면 건물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는 실감과 함께 거슬리는 기분이 들곤 한다고 했다. 속초에서 바가지를 썼다는 이야기들을 유튜브 등에서 접할 때는 속이 상한다. 태어나 서 한 번도 속초를 떠나본 적이 없는 속초 토박이답다.
왜 안 그럴까. 속초가 관광문제로 속앓이를 한다는 것은 이제 비밀에 속하지도 않는다. 오 버투어리즘의 문제는 속초 역시 비껴가지 않았다. 물론, 그는 속초의 미래에 대해 비교적 낙관하는 편이다.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속초의 앞날이 걱정된다 싶을 정도 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몇 가지 생긴 불편이 더 심화되지 않고 속초의 정체성 을 더 이상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바다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타협하고 싶지 않 다. 그물에 매달려 배 위로 올라오는 온갖 쓰레기들을 볼 때마다 당황스러운 기분이 든다.
“그물을 당기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을 많이 건지게 되요. 폐그물 같은 것도 많이 올 라오고, 심지어는 타이어나 화목난로 같은 것까지 별 게 다 있어요. 낚시꾼들이나 캠핑장 이용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장면도 자주 보게 됩니다. 속초를 많이 찾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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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건 감사하고 좋은 일인데, 쓰레기 문제만큼은 신경을 썼으면 해요.”
머구리 단속에 나서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해야겠다. 머구리는 배 위에서 산소를 공급 하는 줄을 단 채 바닥까지 내려가 수산물을 채취하는 방식으로 조업을 위해서는 허가를 받 아야 하고, 구역에 일정한 제한이 있다. 그런데, 이 제한을 지키지 않고 작업을 하는 경우 가 종종 발생해 민간 어선들이 함께 단속에 나서기도 한다. 한 번은 새벽에 혼자 단속을 나 갔다가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은 험한 파도에 가슴을 쓸어내린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단속 에 참여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바다를 지키는 것이 곧 속초를 지키는 것과도 같은 일이라 는 생각 때문 아닐까.
까칠하지만 정 많은 사람들, 속초만한 곳은 없다
속초 사람들은 겉에선 까칠해보여도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하고 부 드럽다고 하면 형용모순 같지만, 속초에선 무리 없이 통용되는 성격 묘사다. 특히, 이효진 선장이 사람들의 정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은 바닷일을 하는 동네 삼촌들에게서다. 어찌 보면 말 보다 행동이 앞선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삼촌들이 예쁜 말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배가 들어올 때면 정박을 위한 줄이라도 잡아주려 하고, 각종 일에 손을 더하는 것을 주저 하지 않는다.
속초를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딜 가도 속초만한 데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른 지역에 살아본 경험은 없지만, 어디 든 놀러갔다 속초에 들어오는 순간, 역시 속초가 최고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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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속초보다 객관적으로 살기 좋은 곳은 많을 것이다. 그가 주변에서 주로 듣는 것처럼, 아이를 가진 집에서는 병원 진료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기도 하다. 속초에는 대학도 없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지역을 떠나는 비율도 높다. 하지만, 익숙하고 친근한 사람들과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이길 수 있는 곳은 없다. 30년쯤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놀러오세요.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에요’ 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이제는 어디서도 들어보기 어려운 말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애정을 갖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아닐까. 수도권, 정확하게는 부동산에 대한 이상하고 무서운 집착으로 설명될 수 없는 지역에 대한 애정을 이효진 선장의 말들에서 본다. 뱃전에서 포즈를 잡은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날이다.
홍현아
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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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바다는 없다
바다가 좋아서, 다이빙이 좋아서 고향을 떠나 속초에 사는 사람이 있다. 학창 시절 우연히 접한 스쿠버 다이빙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속초와 인연을 맺은 후 어느 새 십년이 훌쩍 지났다. 부모님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었지만, 그만큼 속초의 자연과 환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가 보기에 속초는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 것에 더해 도시의 활력 역시 보유하고 있어 온갖 매력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물론, 지금도 그를 가장 설레게 하는 건 속초의 바다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바다 속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아쉽기만 하다. 해상구조활동부터 자원활동에 가까운 배 하부 청소, 수십 명의 다이버가 한꺼번에 출동하는 해양정화활동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향한 그의 애정은 끝이 없다. 속초에서 고스란히 20대를 보내고 삼십대 중반을 맞고 있는 더 스쿠버의 홍현아 다이버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속초, 너는 내 운명
어떤 직업은 사는 지역을 제한한다. 직장이야 제각각 다를 수 있지만, 직업에는 필요한 환 경이 있다. 농부에게는 땅이 필요하고, 약초꾼에게는 산이 필요하다. 다이버에게는? 당연 히 바다가 필요하다. 다이빙을 직업으로 삼은 이상, 서울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는 속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속초 인근 지자체에 위치한 대학에 입학한 후 우연히 다이빙을 접했고, 그것이 인생을 결정했다. 속초가 주는 매력이 무어냐고 묻는 말에 그는 연신 바다 이야기를 했다. ‘같은 바다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스쿠버 하는 사람들의 말에 ‘지구의 70%가 물인데, 그 물 속을 모르지 않나’라는 얘기가 있어요. 바다 속을 들여다 볼 때면 언제나 실감나는 말이죠. 같은 바다는 없어요. 매번 새 로운 바다를 만나는 거예요. 산도 계속 모습이 변한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다는 그 자리에 있지만 사실은 파도 때문에 지형도 바뀌고 지나가는 물고기들도 바뀌고 계속 바뀌거든요.”
듣고 보니 그렇다. 우리 사는 별의 절반 이상을 물이 뒤덮고 있지만, 정작 그 속을 깊이 들 여다보는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고 보면 다이버들은 바다와 육지를 매개하 는 일종의 메신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은 영역을 잠시나마 경험하게 해주는 일이라고 해도 좋겠다. 다이빙 강사로 활동하는 일의 보람 중 하나는 똑같지 않은 바다 풍경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다.
“가을은 속초 바다 수온이 가장 높은 철이고 어종이 풍부할 때예요. 그래서 방어도 보이 고 돌돔도 보이고 그러거든요. 사람들이 외국 바다 갈 거 없이 여기 오면 된다고 이야기하 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바다가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깨닫고 지난번과 바다 가 또 다르네요?라고 묻는 사람도 나오죠. 그럴 때면 다이빙 강사로 사는 게 좀 괜찮을 일 이다 싶은 생각이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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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는 침몰선을 조성해 볼거리를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속초에는 그런 거 없이, 자연만 으로도 볼 만한 게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번두번 방문하며, 그렇게 속초의 매 력을 알아가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가는 일이 그저 재밌고 신난다.
바다와 자연이 좋아 속초에 정착했지만, 막상 생각해 보면 속초의 개방감이 좋았다. 도시의 불빛이 없는 한적한 지역이었다면 무척 쓸쓸하고 심심했을 것 같다. 언젠가 황석영 작가가 시골에 집을 얻었다가 얼마 안 가 도시로 돌아왔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골의 적막함을 몸서리치게 절감한 계기가 새벽녘 옆집 축사에서 들려오던 소 오줌 누던 소리라던가. 속초 는 확실히 서울같이 눈이 핑핑 돌아가는 속도감도 없지만, 귀농귀촌을 이야기할 때의 막막 한 고립감이 있는 곳도 아니다.
“생각해봤는데 속초니까 바다도 보고 서울을 오가기도 편한 거예요. 너무 외진 지역의 전원 생활이라면 좀 답답할 것 같아요. 근데, 속초는 또 그런 느낌이 아니거든요. 관광지라서 그 런 게 크겠지만 밤에 보면 야경도 웬만한 도시만큼 멋있고, 도시 자체에 활력이 있죠. 그러 니까 그렇게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 아니고 유쾌한 기분으로 계속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지역에 거주한다는 게 답답하기만 한 일은 아니다. 지역에는 수많은 가능성들이 있 고, 도시와는 다른 삶의 결이 있다. 하지만, 청년 시절에 변화와 자극이 적은 곳에 적응해서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전 세계가 동시간대로 연결되는 세 계에서, 온갖 종류의 콘텐츠와 화려한 이벤트와 공간들이 실시간으로 넷플릭스와 유튜브, SNS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세상에서 적당한 자극과 활력을 갖춘 도시를 찾는 것은 어 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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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든든하게 지키는 사람들
그렇다면, 속초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어떻게 다를까. 그가 주로 마주치는 사람들은 뱃사람들이다.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거친 인상들이다.
“제 경우에는 대부분 뱃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요. 일하면서 부딪히는 것도 많고, 스크루 에 이물질이 감기면 그런 거 풀어주러 다니기도 하고. 일단 뱃사람들은 얼굴이 다 시커멓 게 타 있고, 배에서 일하니까 목소리가 엄청 커요. 그래서 처음에는 되게 무서웠어요. 잘 웃지도 않고.”
왜 안 그랬겠나. 이십대까지 만난 또래들이나 도시와는 살아온 방식도 환경도 다른 사람들 의 소통방식이 낯설고 두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거다. 하지만 바닷가도 역시 사 람 사는 곳이고, 사람들 사는 모양의 본질은 어디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런데 지내다보니 농담도 많이 걸어주시고, 여기서 뭐라도 하면 와서 관심도 보이고. 환 경 면에서 조금 거친 면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분들이예요. 어디든 그렇겠지만 일정 바운더리 안에만 들어가면 서로 잘 지내시는 면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는 오히려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있다는 속초의 실향민 문화나 가업을 이어받는 이들 을 볼 때마다 ‘이들이 든든하게 지역의 중심을 잡아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 래된 점포들과 건물들을 소유하고 있는 토박이들이 튼튼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청년 세대들이 밖으로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 덕에 속초의 어떤 정체성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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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속초를 지켜줘
속초 사람 외에 속초를 가장 속초답게 하는 것은 역시 자연환경이다. 속초를 대표하는 환 경은 산과 바다다. 산과 바다를 들여다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거다. 가장 유명한 산 중 하나인 설악산을 지척에 두고 살았지만 산에 오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산이 선사하는 풍경은 낭만적이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드라마틱하다.
“사람들이 바다가 멋있다고 하지만, 사실 바다 위에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바다에서 육지 쪽을 보면 물 위에 비친 도시가 보여요. 그 모습이 좋아요. 가끔은 산에 눈 쌓인 게 호수에 비추기도 해요. 그런 풍경이 속초를 가장 속초답게 보이게 해주는 것 같아요. 청초호에 야 경이 비치는 풍경도 일상적으로 좋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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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떠오른 눈 쌓인 산의 모습이라니. 이건 넷플릭스나 유튜브가 제아무리 용을 써 도 따라잡지 못할 감성이고 스펙터클이다. 누구라도 이 장면을 마주하면 속초와, 속초 바다 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바다에 대한 그의 애정은 풍경에 감탄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바 다에서 함께 삶을 꾸리는 이들에게로 확장된다. 스쿠버 일을 하다 보니 선박 하부의 이물 질 제거 작업을 종종 하게 됐다. 사실, 배 바닥에 밧줄이나 그물이 엉겨 붙은 것을 처리하는 일은 듣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까다롭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원래는 따로 비용 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스크루에 이물질이 감긴 것도 아닌데 하부 점검을 해달라고 요청 하는 경우가 많아져 실비를 받기로 했다. 배도 움직이고 사람도 2인 1조로 움직이는 일이 라 더 받아야 하지만,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에게 그럴 수는 없는 법. 동네 사람들에게 기여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해양 정화활동을 진행하기도 한다. 전국의 다이버들에게 공기탱크를 포함한 다 이빙 비용을 지원해 물속에서 쓰레기를 주워 오는 일이다. 적을 때는 20명, 많을 때는 무려 50여명이 와서 함께 활동에 참여한다. 바다 환경을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 로는 다이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물속에 직접 진입해 활동하다보니 다이버는 해양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있다. 다이빙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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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구간에 배가 진입하면 안전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활동공간을 나눠 써야 하는 이슈도 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바다 환경에 가장 큰 문제는 낚시꾼들이다.
“다이버는 수중 생물을 건드리거나 심지어 잡는 이들 때문에 문제가 되죠. 그런데, 그건 정 말 지각없는 일부의 일이예요. 양심 있는 다이버라면 그런 일들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를 하 죠. 지금 일선에서 가장 큰 오염원은 낚시인 것 같아요. 물속에서 보면 정말 심각하거든요. 낚싯줄과 바늘은 수거도 어렵고 고기들이 계속 버려진 바늘에 걸려서 죽는 일이 비일비재 해요. 정말 큰 문제입니다.”
다른 활동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개인 레저이다 보니, 낚시꾼들이 환경에 미 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전국의 낚시 인구는 960만 명에 이르고, 해마다 낚시꾼들이 배출하는 쓰레기만 2만 톤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낚시에 허가제가 필요한 것 아 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실제 미국과 독일, 캐나다, 호주 등에서는 면허제를 도입해 시험과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바다 속 쓰레기를 청소할 때면 낚시꾼들이 그냥 버리고 간 수많은 물건들을 보게 된다. 일회용 플라스틱은 말할 것도 없다. 바닷가에서 바람이 세 게 불다 보니 낚시용 의자나 텐트 같은 것들이 바람에 날려 바다로 쓸려 들어가면 그걸 그 냥 두고 가버리는 경우가 다수라고.
사실, 바다는 무서운 곳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에 비해서는 낫다고 하지만, 동해 바 다의 시야 역시 열대 기후를 갖춘 동남아의 바다처럼 쨍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가끔 깜깜한 바다 속에 들어가 있다 보면 십년을 넘게 드나든 바다라도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 다. 한 번은 배가 그물에 걸렸다고 해서 작업을 하러 나갔다가 거센 조류에 휘말려 물 위에 뜬 채 1KM 가량을 그대로 떠내려간 적도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인명구조 활동에 참여하면 더욱 실감한다. 바다에서 실종은 대개 목숨과 결부된 사고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 이다. 바다는 이 모든 것의 이름이다. 찬란한 바다도, 무서운 바다도 모두 그가 사랑하기로 한 삶의 터전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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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제가 사는 세상이죠. 바다에서 놀기도 하고 추억도 많이 만들고 일도 하고 돈도 벌 고. 지금은 바다에 제 인생이 있고, 바다에서 이루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바다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이다보니,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바다 속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들 중 하나가 방파제 공사다. 항만이 넓어지고 안전의 문제를 해결하려 다 보니 방파제를 추가로 건설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다보니 바다가 원래 모습으로 남아있 을 수 없게 된다. 수심이 유지되어야 하는 다이빙 포인트에는 치명적이다. 물론, 해양생물 에도 영향이 간다. 넓게 보면 속초가 변화하는 속도와 폭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겠다. “속초 바다가 그대로 보존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10년째 주기적으로 가는 바다 포인 트가 있는데 그 앞에 방파제 공사를 했어요. 어느 날부터 모래가 쌓이며 수심이 얕아졌죠. 원래 수심이 9m였는데, 이제는 4m밖에 안 나와요. 5m나 되는 생태 지형이 다 묻힌 거죠. 바다가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졌어요. 바위들이 얼기설기 있어서 물고기도 많고, 겨울이면 도루묵이 알을 낳으러 수초 사이로 오가고 했는데 이제 볼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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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다이빙 일을 시작했을 때 자주 보던 물고기들을 요즘 잘 볼 수 없게 된 것도 환경변화에서 비롯됐다고 느낀다. 사실, 이 문제는 기후라는 거대한 변화와 직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관광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개발, 오버투어리즘과도 겹쳐있다. 이제는 주말 관광객과 동선이 겹치면 속초 안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다. 사람이 많아지면 기반시설과 편의시설이 더 필요해진다. 개발을 일시에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정선을 어디에 둘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으면 속초가 가진 매력을 잃어버리는데 가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다. 특히, 자연환경은 개발 이후에는 다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결정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삶은 이렇게 거대한 시스템과 불편하게 교차한다. 오늘도 남몰래 바다 속을 청소하고 홀로 뿌듯해 하는 마음은 어떻게 도시와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까 묻게 되는 날들이다.
김정보
설악산악연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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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토박이 산악인의 설악산 사랑법
“속초는 축복받은 고장이죠. 설악산이 속초를 감싸듯이 품고 있잖아요. 외국의 높은 산을 다녀 봐도 설악산만한 산이 없는 것 같아요.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다고 할까? 설악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아늑하고 푸근해요.”
속초 토박이 산악인의 설악산 사랑법
설악산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험한 산으로 손꼽힌다. 산세가 험하고 깊고 높은 절벽에 폭 포도 많아 전문 산악인들로부터 동경과 우러름을 받는 산이다. 20대부터 30여 년간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걸어온 속초 토박이 김정보씨는 설악산이 어머니의 품과 같다고 한다. 거 친 바위산이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다고 느끼는 건, 그가 설악산을 너무 사랑하고 있기 때 문이 아닐까? 하기야 누구라도 속초에 오래 살면, 속초를 감싸는 설악산이 포근하고 정겹 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그는 지난 2023년 1월부터 설악산악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다. 설악산악연맹은 30여년 전 인 1990년에 창립한 산악단체연합조직이다. 지금은 16개 산악단체가 가입해 있어 속초 산악인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해마다 설악산 산사랑인 체육대회를 비롯해 설악문화 제 등산대회, 암벽등반교실, 설악산 자연보호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김정보씨는 설악산악연맹 회장직과 함께 또 하나의 중책을 맡고 있다. 한국산악회설악산 산악구조대 대장이다. 그는 속초의 산악인일뿐 아니라, 수십 년 간 설악산에서 구조활동에 해온 민간 산악구조대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영랑호를 벗 삼아 놀다 김정보(58세)씨는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에서 태어나 5살 때 속초로 이사 왔다. 영랑초등학 교 남쪽 마을에서 영랑호를 벗 삼아 어울려 놀며 성장했다. 더운 여름에는 홀딱 벗고 영랑호 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비가 많이 와서 영랑호 물이 불어나면, 빨간 고무대야를 타고는 작은 삽을 저으며 놀기도 했다. 날이 추워지면 영랑호가 꽁꽁 얼었다. 그럴 때는 빙구(썰매)를 타 고 영랑호 가생이를 한 바퀴 돌아오면 한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깨진 얼음 위를 배처럼 올라 타고 놀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영랑호 물이 맑아 재첩도 캐서 끓여 먹었다. 이런 기억을 안 고 자란 김정보씨는 영랑호 지키기에도 열심이다. 최근에는 영랑호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 공구조물이라며, 호수를 가로지르는 부교 설치를 반대하는 시민 활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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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정보씨는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진학 대신 취업을 하게 되었다. 성남에 있는 외삼촌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하며, 활자로 조판을 하고 인쇄하는 기술을 배웠다. 다음해 입영 영장이 나와서 고향 속초로 돌아왔는데, 일이 생겨 소집 면제가 되어 군대를 가지 않았다. 입대를 앞두고 속초로 내려오면서 설악산과 평생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속초 대청산악회 회원으로 가입해 김철섭, 이형복 선배들과 함께 설악산을 오르게 되었다. 이후 군에 가지 않게 되자 속초의 인쇄소에서 입사해 1년간 일한 후 속초수협 제빙공장에 취업했다. 그러 면서 열심히 산을 다니다 보니, 워킹 산행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전문 산악인처럼 암벽 이나 빙벽을 타고 싶었다. 암벽 빙벽 등반의 짜릿한 스릴이 좋았다. 바위에 매달려 남들은 볼 수 없는 설악산 풍경을 즐기는 것도 좋았다. 당시에는 전문 등반을 배우기가 쉽지 않았 다. 그래서 전문등반을 제대로 배워보려고 1986년 12월 말 선배 몇 명과 함께 설뫼알파인 클럽을 창단해 활동했다. 그리고 등산잡지를 통해 설악산에서 열리는 한국등산학교를 알 게 되어 동계반과 하계반에 각각 입교해 일주일씩 전문등반을 배웠다.
24살에 에베레스트 등반을 다녀오다
첫 해외등반으로 1989년 8월부터 4개월 동안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등반을 다녀왔다. 1988년 여름 설악산 비선대 장군봉에서 한국산악회 기술위원회가 실시하는 하계 암벽등 반 훈련을 한국산악회 설악산산악구조대 대원들과 함께 받았다. 이 자리에서 구조대 측으 로부터 가을에 꾸리게 될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함께 참가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해외 등 반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더 없는 좋은 기회였다. 기쁜 마음에 흔쾌히 수락하고, 주말을 이 용해 열심히 준비훈련에 참가했다. 나중에는 합숙훈련까지 받았다. 울산바위 암벽등반 훈 련 중에 약 40m 정도 추락해서 공중에 매달리기도 했다. 간신히 탈출했지만 부상으로 목 발을 해야 했다. 훈련 중에 에베레스트 대원 선발에서 제외될까봐 북한산 인수봉까지 목발 을 짚고 오르기도 했다. 2년 반 근무한 수협 근무도 장기간 해외원정을 가면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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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l 김정보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등반대에 속초에서는 산악구조대원인 박영규씨와 황기염, 김정보 가 함께 했다. 나이가 가장 어린 김정보가 등반대의 막내로 합류했다. 총 4개월 일정 중 실 제 등반은 50일이 소요되었다. 등반대는 에베레스트 서쪽 능선을 타고 올라가 7,500m 지점까지 올라갔다. 날씨가 안 좋아 아쉽게도 에베레스트 정상공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워킹 등반만이 아니라 암벽, 빙벽 등 전문등반에 매료된 김정보씨는 설악산을 오르기 시작 한 지 10년 동안 설악산 모든 코스를 등반했다. 그리고 1989년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작 으로 1992년 미국 맥킨리와 요세미티 등반, 1997년 일본 북알프스 등반, 2012년 알프스 몽블랑 등반을 다녀왔다. 그는 “왜 그 힘든 산을 올라가느냐”라는 질문에, “머리가 나빠 힘든 건 쉽게 잊어버려 다시 산에 올라간다”라고 우스갯소리로 대답했다. 에베레스트 등반 후에 진짜 그런 경험이 있다.
“에베레스트와 같은 고산을 오르면 정말 힘들어요. 고산증으로 두통도 정말 말도 못하게 심해요. 그때 나는 다시는 힘든 산에 안 간다고 마음먹었지요. 그해 11월 속초로 귀환했 는데, 정말 내가 미쳤지.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비선대로 해서 대청봉에 또 올 라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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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한 사람 끝내 못 살려 펑펑 울기도
설악산은 험한 고지대가 많아 예전부터 조난사고가 많이 발생해 국립공원 중에서는 북한 산 다음으로 안전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지금은 설악산 119 산악구조대와 국립공원 구조 대가 잘 편성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설악산의 조난사고 구조활동은 주로 민간 산악인들의 자원봉사로 이뤄졌다. 지금도 설악산 국립공원에는 모두 4개의 민간인 구조대가 활동하고 있다. 그중 한국산악회설악산산악구조대는 순수 민간 산악구조대로 1978년 45명의 대원 으로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등반을 계기로 1990년부터 한국산악회설악산산악구조대 활동을 시작했다. 아울러 설악산 산행가이드를 직업으로 삼았다. 봄과 가을에는 안전요원으로 수 학여행단 학생들을 인솔했고, 기업연수단체를 봉정암이나 대청봉까지 안내했다. 암벽을 타 는 릿지 등반을 비롯해 전문등반 가이드도 했다. 그러나 수입이 신통치 않아 1993년 결혼 후에는 비수기에 아내 몰래 공사현장에 나가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7년 10월부 터 보험 영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종사하고 있다. 산악구조대 활동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구조가 되어 살 아난 분이 찾아와 고맙다고 말할 때는 정말 기쁘고 큰 보람이 느껴졌다. 그러나 있는 힘 을 다해 구조해 왔는데도, 사람을 살리지 못했을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파 펑펑 울기도 했다.
“1990년 제가 구조대를 시작한 해였어요. 7월 15일 설악산악연맹 창립식을 소공원에서 하던 날로 기억해요. 그날 다람산악회 회원 4명이 천화대 릿지 등반 중에 추락했어요. 사 고로 두 명은 즉사하고, 두 명은 위중했어요. 소식을 듣고는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들 것 을 만들어 위중한 사람 한 명을 싣고는 여럿이 들고 내려왔어요. 내려오는 도중 내가 계속 그 사람을 만졌는데, 맥박이 뛰고 있어서 살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와선대까지 데리고 내려왔더니, 119가 이미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 소리에 넋이 나간 채로 앉아서는 슬 퍼서 펑펑 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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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8년 설악산 토왕성폭포 눈사태 사고 구조작업을 가장 힘들었던 일로 기억하고 있 다. 그 해 1월 14일 저녁 토왕성폭포 초입에서 빙벽등반 훈련을 하던 경북대 학생 6명과 등반객 2명이 눈사태로 매몰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 때 김정보씨는 11일 동안 토왕성 폭포 사고 현장에 올라가서 깊게는 15m 4층 건물 높이로 쌓인 눈을 옮기는 작업을 함께 했다. 구조대원, 공무원에다 군인들과 의무경찰까지 하루에 3백여 명이 투입되었다. 날도 춥고 바람까지 불어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 모두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울산바위 쓰레기 수거 작전도 펼쳐
설악산은 어딜 가도 어느 위치를 봐도 경관은 정말 빼어난 곳이다. 김정보씨는 설악산에서 도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천화대를 손꼽았다. 천화대는 비선대에서 양폭으로 가는 길 오른 편 설악골에 접한 바위능선으로 기암괴석 바위들이 계속 이어진다. 하늘 높이 솟은 준봉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 꽃들이 피어 있는 형상이라서 천화대(天花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전문 산악인 사이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암릉 릿지코스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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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이 곳은 너무 위험해 일반인들에게는 금지된 비법정코스이다. 암벽등반을 하는 전문산 악인들만이 사전에 국립공원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오를 수 있다. 산악구조대 활동 말고도 김정보씨는 설악산을 보존하기 위한 자연보호활동을 꾸준히 해오 고 있다. 20여년 전인 1998년 4월에도 울산바위에서 산악구조대원들과 함께 50m 가량 자일을 타고 쓰레기를 수거한 적이 있다. 지난 2021년 10월 26일에도 한국산악회설악산 산악구조대와 설뫼알파인클럽 공동으로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한 바위 틈까 지 자일을 타고 내려가 쓰레기를 수거하는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설악산국립대학 시민대학을 수료한 후 총동문회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국립공원 자원봉 사자로 1년에 100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속초에서 열리는 설악문화제 등산대회는 해마다 설악산악연맹이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산 악연맹 김정보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설악문화제 등산대회 실무를 맡아왔다. 올해는 속 초시 승격 60주년을 맞아 달마봉 코스를 7월과 9월 두 차례 열린 걷기 행사를 진행했다. 달마봉 걷기 행사가 인기가 좋아 9월 설악문화제 행사 때는 2시간 반만에 5백명의 참가자 모집이 끝나기도 했다.
“걷기 행사를 하려면 진행요원들이 최소한 세 번 코스를 다녀와야 해요. 사전에 코스를 점 검해 위험구간에는 안전로프를 설치하고, 길안내 푯말도 설치합니다. 달마봉 코스는 샛길 이 많아서 자칫하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어요. 행사 진행 중에는 중간 중간에 안전요원을 배치해 혹시 모를 사고 위험에 대비해야죠. 행사가 다 끝나면 다시 코스에 설치된 시설물을 수거하러 산에 다녀와야 됩니다. 이런 일은 산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최근 속초시내에는 고층 건물도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그는 이런 변화가 참 불편하다. 사 랑하는 설악산도 가리고 아름다운 경관도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2023년 12월 속초 동명동성당이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어, 성당 앞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어렵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속초 토박이 산악인 김정보씨는 속초도 변함없이 그대로인 설악 산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작은 소망을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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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시는 엄청 많이 변했죠. 그러나 설악산은 항상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산은 항상 저기 그대로 있어요. 울산바위도 저 자리에 계속 있잖아요. 속초도 설악산처럼 오랫동안 변함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잘 지켰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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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건 이상국 최윤성
김영건
동아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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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와 서점과 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서울 생활을 정리한 뒤 속초로 내려와 서점지기가 된 김영건 대표의 이야기는 몇 권의 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가 쓴 글들은 자극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담백하고 과장되지 않은 문장과 태도가 주는 즐거움을 잔잔하게 전해준다. 그가 서점을 꾸려나가는 걸 보면 작은 과정 하나도 거르지 않고 꼼꼼하고 우직하게 원칙을 지켜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누군가는 답답하고 고지식하다고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하나의 세계를 직조해 나가듯 한땀한땀 서가를 채워 나갈 책들을 고르고 오늘도 손님들을 다정하게 관찰하는 그는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서점을 찾아오는 단골손님에 대해서는 숱한 얘깃거리와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면서도 어째선지 속초를 속초답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독 어려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에게 속초는 사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지역과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애정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곳, 동아서점에서 김영건 대표를 만났다.
물려받은 애정
당연히, 서울에서 살게 될 줄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그곳에서 자리 잡아 살게 될 거라 생각했다. 지방도시에서 출세하는 건 그렇게 서울에서 취직해 정착 하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덜컥 서점을 운영하게 됐다. 어째선지 오래 고민 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서점을 하는 아버지 곁에서 자랐지만, 직접 서점을 운영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서점을 운영하며 시간을 보 내다 보니,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생 서점을 운영해 온 부모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속초에 대해 어떤 각별한 맘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부모님과 엮여서 나온 맘이라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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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건 대표는 서점만 물려받은 게 아니라 속초를 애정하는 마음 역시 부모에게서 물려받 은 게 틀림없다. 부모님은 매일 새벽 영랑호에서 운동을 하신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시작 된 일이니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그런데, 운동만 하시는 게 아니다. 매일 아침 영랑호에서 쓰레기를 줍는다. 대강 몇 개만 줍고 마는 것이 아니라, 호수변까지 내려가 눈에 띄는 쓰레 기는 모두 정리하는 식이다. 매일 들고 나간 종량제 봉투가 가득 찰 만큼 쓰레기를 줍는다. 이 정도면 운동을 하다가 쓰레기를 줍는 건지, 쓰레기를 줍다가 운동을 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영랑호에서 운동을 하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다. 가벼운 에피소드 하나에서 속초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제가 운동화를 새로 사드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화가 다 걸레가 될 정도로 열성적이 세요.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영랑호 근처에 산다는 것, 더 나가 속초에서 산다는 것 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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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서점이 된다는 것
그는 속초에 대해 뿌리 깊은 애정을 고백한다. 가정을 꾸려 사는 곳이고, 고조부모부터 5대 에 걸쳐 살아 온 곳이니 당연한 애정이 자리 잡았다. 거주지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런 것이 지만,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사는 곳에 대한 자부심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순간부터인 가 삶터가 부동산 문제와 결부되며 지역에 대한 애정보다는 서울과 비교하며 집값을 따지 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심지어 같은 지역 안에서도 경제적 처지에 따라 다니는 학교가 다르고, 아이들마저 서로 섞이지 않는다.
“최근에 TV를 통해 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초등학교가 서로 붙어 있는데 한 학교는 주로 차상위 계층을 포함한 서민층 아이들이 가는 곳, 반대편에는 중산층 이상의 학생들이 가는 학교로 나눠졌대요. 중산층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서민층 학교 아이들 사는 근처에도 못 가 게 막고, 어울리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봤어요.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하지만, 서점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수시로 마주한다. 남녀노소는 물론이 고, 문화누리카드라고 불리는 복지카드 사용자들도 많다. 군인이나 장애인, 성소수자를 비 롯한 소수자들이 서점을 이용하는데도 제한이 없다. 그는 서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조용 히 지켜본다. 관찰의 결과는 다시 속초로 돌아온다. 그는 서점의 단골과 손님들을 통해 사 람에 대해 알게 되고, 그 경험은 다시 속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귀결되 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 서점의 의미라고 하면 저는 다양한 계층,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언젠가 서점에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손녀와 같이 오셨어요. 문화 누리카드가 11만 원 정도 됩니다. 그걸로 책을 모두 사니까 양이 많잖아요. 그걸 들고 가 실 수가 없어서 나중에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죠. 받은 주소로 찾아갔더니, 집 문을 열자마 자 현관문 바로 앞에 침대가 있더라고요. 보통 그런 구조는 잘 없잖아요. 속초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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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서점은 지역서점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다. 2015년 그가 서점을 맡은 이후 한 동안 지역서점 붐이 일었다. 2014년 도서정가제 시행의 영향과 함께 서울로 대표되는 과잉경쟁 에 휩쓸리지 않고 지역에서 자신만의 활동을 펼치겠다는 트렌드가 반영된 일이었다. 1956 년부터 3대에 걸쳐 운영해 온 지역책방이라는 스토리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공간을 이전하고 새롭게 꾸린 서점은 책을 주문하는 방식부터 서가의 배치, 북 토크와 전시에 이르기까지 지역을 넘어 책과 책을 보여주는 공간에 관심 있는 이들의 주목 을 받았다. 2022년에는 프랑스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포르투갈의 렐루서점 등 세계적 인 서점의 운영자들과 함께 서울국제도서전의 연사로 초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 콘보다 ‘지역 서점’ 자체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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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에 걸쳐 운영했다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서점이었던 거고 제가 그 세월을 공짜로 가져갈 수는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하면 서점이 지역에 제대로 뿌 리내릴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고 그렇게 운영하려고 했어요. 그건 단기간에 무슨 이벤트로 되는 일은 아니죠. 매일 서점이 지역민들과 만나면서 하루하루가 축적돼서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단골손님을 포함한 지역 사람들과 어떤 표정으로 어떤 이야기로 만나는지에 관 심이 많을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동아서점에 이벤트가 없다고 하면 오산이다. 2015년 이후 작가와의 대화도 꾸준 히 열고 있고, 단행본과 속초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시즌마다 기획전을 열어 속초의 깊이 와 감수성을 나누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다만, 이벤트의 본질은 언제나 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특정 취향을 지닌 이들만 찾는 독립서점과는 다르게 동아서 점은 종합서점인만큼 고객들의 요구도 다양하다. 사소하게는 바둑책을 찾는 사람부터, 지 역에서 책이 아닌 다른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을 묻는 사람도 있다. 한 번은 백두산의 생 태 환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어르신에게 책과 함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 등을 알려 드린 적도 있다. 단지 책을 거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점을 드나드는 지역민의 요구에 구체 적으로 부응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는 언젠가 속초가 고향이라서 특별한 게 아니라 고 향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람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성실함이 쌓이고 쌓이면 지역 서점의 성격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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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디한 도시, 속초
속초에는 동아서점을 비롯해 특색 있는 책방을 여행의 목표로 삼고 오는 이들이 유독 많다. 여행객들을 통해 속초 사람들이 좀 퉁명스럽고 경계심이 많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는 실 향민 도시의 정체성이 그런 데서 드러난다고 해석한다. 이제는 많이 희석됐지만, 속초 지역 말씨에도 그런 억양은 남아있다. 하지만, 동시에 속초는 개방적이고 열린 도시이기도 하다. 속초가 관광도시로 유명했던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서울-양양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에는 이전과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속초를 자연환경, 실향민과 산업 변화로 축적된 인구구조, 관광산업에 따른 트렌디한 도시의 복합물로 규정한다.
“속초는 누가 뭐래도 천혜의 자연 환경이 한 축을 이루는 도시죠.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전 쟁 이후 실향민들과 어업의 성황으로 인해 여러 도시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함께 살기 시작 하면서 만들어진 정체성이 한 축을 구성하고 있어요. 또 다른 한 축으로는 2천년대 이후로 관광 도시로 급성장하면서 젊은 층들이 많이 유입되어서 트렌디한 도시로 변하고 있죠. 이 세 가지 축이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특유의 활력이 있어요.”
이 활력 덕분일까. 외지에서 온 사람들도 속초는 지방 소도시 같지 않게 카페나 식당을 비 롯해 불편한 게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물론, 최근의 트렌디함이 야기하는 불편이 없 지 않다. 중앙시장만 해도 이제는 관광객들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속초에 대해 아쉬 운 점을 물었을 때 그가 내놓은 답변은 흔히 듣는 것처럼 관광객들로 인한 불편이나 기반시 설의 부족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속초가 산, 바다, 호수까지 천혜의 자연환경을 모두 갖췄는데 여기 예술의 전당까지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기반시설에 대한 것은 속초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서 비롯하는 극복하 기 어려운 한계라고 봐야죠. 정작 아쉬운 것은 속초가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갈 건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거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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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유행에 편승하고 트렌디한 것들에 좌우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최근 몇 년간 불었던 부동산 광풍도 마찬가지다. 속초 시민의 숫자는 그대로인데, 예정된 아파트 가구 수는 상당하다. 장기적인 전망 없이는 속초의 미래와 자연환경에 부담이 되 는 결정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대하게 되는 것은 지역의 감수성은 역시 서울과는 약간 다른 궤적을 보인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기후나 환경을 이야기할 때는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말자는 느낌이 많았다면 속초에서는 구체적인 행동과 결부되어 있다 고 할까. 최근 영랑호를 가로지르는 부교가 만들어질 때 속초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선 일 이나, 바다 쓰레기 문제에 대해 대응하는 모습 등을 보면 생활과 직결되는 감각들이 두드 러진다. 시민들의 이런 사소한 감각들이 속초의 미래를 예견하는 키워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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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그러나 위대한
그는 속초의 매력을 구석구석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가 두 번째로 쓴 책이 바로 속초 에서 꼭 가봐야 할 곳들을 차곡차곡 정리한 안내서(김영건 대표가 쓴 <속초>(21세기북스, 2019)는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도시 의 안내자가 되기 위해 우선 도시의 여행자가 되었다고 썼다. 외지인의 시선에는 아마도 속 초가 가진 자연환경 산, 바다, 호수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매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 다. 사실, 속초의 매력을 몇 해 전까지는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서점을 맡기 시작한 2015 년 이후 7년간은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일을 해 왔기 때문이다. 젊은 패기에서 비롯된 일 이기도 하지만, 종합서점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그만큼 많기도 했다.
2021년부터 동아서점은 일요일을 휴일로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여행객들을 포함한 방문 객이 가장 많을 일요일을, 매출감소를 무릅쓰고라도 쉬기로 한 것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지 않는 날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매일 아침 영랑호에 서 운동을 할 때는 미처 몰랐던 아름다움을 휴일을 운영하며 새롭게 느끼고 있다.
“서울에서 아이 키우는 같은 세대 부모들은 키즈카페 갔다가 또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어딘 가를 찾아 갔다가, 또 다시 아이가 흥미를 느낄 만한 곳을 찾느라 분주해요. 저희는 지금까 지 그런 고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바로 집을 나서면 동네에 바다, 산, 호 수가 다 있잖아요. 또, 설악산 자생식물원 같은 자연을 매개로 해서 즐길 수 있는 장소와 활동들이 많거든요.”
김영건 대표의 아이는 속초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궁금해진다. 아이는 속초를 애정하게 될까. 속초에서의 미래를 꿈꾸게 될까. 김영건 대표가 어린 시절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속 초의 매력에 대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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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뒤늦게 돌아와 부모님을 보면서 속초를 다시 바라보게 된 것처럼 아이도 저를 통해 서 똑같은 반복은 아니지만 속초에 대해 자기 나름의 애정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러려면 저부터 지역 구성원으로서, 특별하지는 않지만 속초에서의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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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이어 전달되는 지역에 대한 어떤 감각들은 평범한 동시에 위대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부모들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역사를 만들어 온 동력 중의 하나는 아닐까. 속초에 대한 애정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서점을 매개로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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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는 이상국 시인이 살고 있다
서울이나 대도시를 나라의 중심으로 보는 이들은 속초와 양양을 변방이라고 한다. 이런 시각으로 봐도 평생을 변방에서 살아온 이상국 시인이 이룬 문학적, 사회적 성취는 그 누구보다도 더 빛날 수밖에 없다. 이상국 시인의 존재는 양양과 속초 지역의 자랑이며 자부심이다.
속초에는 이상국 시인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 문인들 사이에서 ‘속초’ 이상국 시인이 살고 있는 고장으로 통한다. 양양 출신 이 경자 소설가는 지난 2020년 자신의 글에서 이상국 시인을 ‘고향 까마귀 시인’이라며, “속 초에 이상국이 산다. 앞뜰엔 동해안, 뒤뜰엔 설악산, 그리고 그 사이에 이상국이 산다!”라 고 했다. 정철훈 시인은 자신의 시 「속초」에서 이상국 시인이 “동쪽 술은 다 잊으셨는지” 라고 문자를 보내왔기에 “속초에 가야겠다/가서 동쪽 술맛을 봐야겠다”라고 했다. 정철훈 시인은 “웬만한 문인이라면 그의 일터였던 만해마을에 신세를 지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 라고 거들었다. 이경자 소설가와 이상국 시인은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최근 두 문인이 한국작가회의 이사 장을 연이어 맡았다. 이경자 소설가가 2018년부터 2년간 먼저 맡고, 이어서 이상국 시인이 2020년부터 2년간 맡았다. 양양 출신으로 속초에서 살아온 이상국 시인은 문학적 성취와 함께 대한민국 문인들을 대표하는 자리를 역임하는 사회적 성취도 함께 이뤘다. 속초 출신 고형렬 시인은 이상국 시인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함경 머리의 동환, 용악, 서 북의 소월, 백석에 이어 영북의 이상국으로 이어지는 시는 슬프고 면면하다”라며, “중앙이 아닌 동해안 파랑과 변방의 중심 그 속마음 깊은 바닥에 떨어져 보석에 닿은 이상국의 사유 와 선율은 해가 뜨는 양양의 아침 해역이 되었다”라고 했다. 서울이나 대도시를 나라의 중심으로 보는 이들은 속초와 양양을 변방이라고 한다. 이런 시 각으로 봐도 평생을 변방에서 살아온 이상국 시인이 이룬 문학적, 사회적 성취는 그 누구보 다도 더 빛날 수밖에 없다. 이상국 시인의 존재는 양양과 속초 지역의 자랑이며 자부심이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문필가를 꿈꾸다
이상국 시인(77세)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양양 강현면 강선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 형적인 소농으로 한학을 해서 글 쓰는 일로 동네 사람들을 도와주셨다. 어머니는 정선 사 람으로 강릉 함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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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양양 강선리의 농촌문화는 이상국 시인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시인은 “나는 그 곳 의 산천을 물려받았고 농사하는 부모를 통하여 수천 년의 농경문화를 태반으로 나고 자랐 다. 농업적 사고와 투박한 언어들, 삶의 양식과 정서는 내 시의 바탕이자 원적지가 되었 다.”라고 했다. 이상국 시인은 유년 시절 기억은 없지만, 전쟁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시인은 “6.25 전 쟁 중 기총소사가 있던 날 어머니가 나를 부엌에 쓰러뜨리고 내 위에 엎드렸는데, 그때 어 머니 심장과 내 심장이 함께 뛰던 그 터질 것 같은 박동소리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전쟁 당시 양양과 속초는 38선 이북 인공 치하의 북한 땅이었다. 인공 치하와 전 쟁, 수복을 겪은 38선 이북 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시인은 그 어느 작가보다도 분단과 실 향의 아픔을 더 절감할 수 있었다.
이상국 시인은 강현초등학교 시절부터 작가를 꿈꿨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장래 뭐가 되고 싶냐고 하면 나는 문필가가 되겠다고 했어요. 그러 면 선생님은 ‘그게 뭔지는 알고 그렇게 말을 하냐’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뭐 시인이 된다는 게 뭔지도 모르지만 그냥 글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어요. 동시도 쓰고 여러 가지 글도 잘 썼어요. 방학 때 글쓰기 숙제를 해가면, 선생님이 ‘야, 이거 너가 안하고 형이 써줬지?’ 라고 남이 써준 걸로 의심하기도 했어요.”
1960년 속초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속초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꼬박 6년을 집 에서 학교까지 왕복 50리를 걸어 다녔다. 어른 걸음으로 꼬박 5시간을 걸어야 하는 먼 거 리였다. 중학교 다닐 무렵에 교직에 계시던 숙부의 서가에서 찾아낸 시사잡지 『사상계』와 소월시집을 읽었다. 이상국 시인은 “소월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만난 시인으로, 그 소월 은 아직도 내 속 어딘가에 있다”라고 밝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문학과 일탈, 반항으로 이어지는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냈다. 시인 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백일장, 실기대회를 쫓아다니고, 당시 인기 학생잡지 『학원』에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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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현대문학』을 구독했다. 일탈과 반항도 심 했다. 술 마시다가 무기정학을 맞기도 했고, 일부러 월사금을 안 내고 며칠씩 산이나 바다 를 헤매기도 했다. 역사와 사회 과목 같은 것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수학이나 과학 시간에 는 대놓고 소설을 읽었다. 선생님들도 이상국을 아예 제쳐놓았다. 그 시절 문학도를 꿈꾼 이상국을 인도해 줄 스승이나 선배는 없었다. 뒤에 이상국 시인은 자 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방치된 영혼, 결핍과 자기낭비의 시절”이라며, “진학이나 졸업 후의 막연한 진로에 대한 불안과 비관, 좌절의 분출이기도 했다”라고 소회했다.
동쪽의 새장에서 탈출하려다 실패하고
이상국 시인도 젊은 시절 고향을 탈출해 더 큰 세상으로 나가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젊은 그에게 태어나고 자란 ‘동쪽의 끝’은 높은 고개로 가로막혀 세상과 단절된 새장같이 갑갑 하기만 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모 교대에 남의 대리시험 을 봐주러 갔다가 일이 꼬여 자신의 이름으로 합격하고 말았다. 그래서 대학을 보내달라고 집에서 데모를 했다. 시인은 자신의 시 「자두」에서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 라고 데모했다/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데모도 실패하고 말았다. 인생의 첫 좌절이 었다. 패배감을 잊으려고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결국 이상국 시인은 가출을 감행했다. 「나를 기다려준 나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인은 “나 는 20대 때 돈을 벌어보기 위하여 아버지의 소 판 돈을 몰래 들고 진부령을 넘어 서울로 가 출한 적이 있었다”며, “정주영 현대왕회장은 일찍이 아버지 소 판 돈을 들고 나와 불세출 의 부자가 되었지만, 나는 서너 달을 못 넘기고 귀항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밝혔다. 몇 번의 가출과 출구를 찾기 위한 방황이 계속되었다. 몇 년간 서울에서 생활했지만, 막막 하고 외로웠다. 한마디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비빌 언덕이 없었다. 결국 정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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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에 실패한 이상국은 고향에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재건학교 교사를 하기도 하고, 회사 일을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몇 년 잘 있었어도 시를 쓰지 못했는데, 돌아온 이후에 다 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스물여섯 되던 해인 1972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문밖에서』라 는 시로 당선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3년에는 지역의 문학단체인 『설악문우회』에 가입해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1974년에는 고향 동네인 양양 강현농협에 입사했다. 이때부터 이상국 시인은 20여 년 동안 양양과 속초를 돌며 농협 직원으로 근무했다. 1981년에는 이 성선, 최명길, 고형렬 등과 ‘물소리 시낭송회’를 잠깐 같이 하기도 했다.
“갈뫼 4호를 시작으로 매년 한 5,6편 발표하면서 24집까지 20년 간 좋은 선배들과 함께 문학 수업을 했어요. 최명길, 이성선, 박명자 등 시인들과 함께 했지요.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지방지라고 해서 따로 원고청탁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그 래서 다시 4년 후인 1976년에 박목월 선생님이 주관하는 문학지 『심상』에 「겨울 추상화」 로 재등단했어요.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조금씩 활동을 하게 되 었어요.”
시인은 수십 년을 속초를 지키며 살아왔다. 젊은 날 탈출 실패가 본인에게는 큰 아픔이었 겠지만, 속초와 양양 지역으로서는 너무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그 탈출이 성공했더 라면, 속초 주민 이상국 시인은 없었을 것이다. 속초와 양양의 이야기를 담은 시인의 주옥 같은 시도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부끄럽고 아린 마음을 붙들고
이상국 시인은 1985년 등단 10년 만에 첫 시집으로 『동해별곡』을 펴냈다. 생면부지였던 신경림 시인에게 발문을 부탁했는데, 흔쾌히 들어주었다. 등단 시인의 첫 시집으로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나이도 마흔에 접어들었다. 198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내일로 가 는 소』를, 1992년에는 세 번째 시집 『우리는 읍으로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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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1980년대는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는 이상국 시인으로서는 부끄럽고 아린 마음에 차마 견디기 힘들 시절이었다. 전두환 독재 정권하에서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글을 쓴다는 시인들도 감옥에 붙잡혀 갔다. 이상국 시인은 이런 시국에 자신은 시골 농협 창구에서 주 판알이나 굴리고 있다는 자조와 강박에 시달렸다. 1987년 늦깎이 결혼을 하고는 제주도로 가는 신혼여행길에 광주에 들러 망월동에 가서 참배를 하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하지 못한 이상국 시인은 분단과 실향으로 멍든 지역주민의 아픔을 자 신의 시에 담아 표출했다. 민주화운동에 한참 격렬했던 1986년 이상국 시인은 「대포동 吳씨 일가」라는 시를 지어, 다음해 1월에 발간해 배포하는 속초문화원 문화지에 게재했다. 일제시대 탄광 징용 피해, 38선 이북 대포 출신 인민군 장교와 한국전쟁 이야기, 친구인 오강환의 납북귀환과 요절 등 짧은 시 한 편에 수복지구 주민이 겪은 시대적 아픔을 모두 담았다. 시인은 시의 말미에 “적이 적을 몹시 그리워하는 반도, 바다바람에 큰 꼬질대 휘 청거리는 하늘밑에서 나라의 어머니가 슬피 우는데 나는 피 가득한 장화를 끌며 한 튼튼 한 어부가 침묵과 도피로부터 그렇게 해방되는 것을 보았다”라고 절규했다. 속초 문화예 술계에서 분단과 실향으로 인한 지역주민의 희생과 아픔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이상 국 시인이 처음이었다. 이상국 시인은 청호동 아바이마을 실향민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시인은 1986년 『심상』 에 「청호동에 나무를 심는 일은」을 시작으로 청호동과 갯배에 관한 시를 계속 지어 발표 했다. 시인 이상국은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에서 “마흔 해가 넘도록/ 오징어 배를 가르는 사람들의 고향을 아는지/그 청호동이라는 떠도는 섬 깊이/수장당한 어부들을 보 았거나/신포 과부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는 지”라며, 속초 실향민들의 수난과 아 픔을 표현했다. 이상국 시인은 속초 실향민의 존재와 그 아픔을 전국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4살부터 6년간 집에서 청호동을 거쳐서 학교를 통학했지요. 그때는 청호동이 뭔지도 몰 랐었어요. 1980년대가 되면서 ‘여기가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사는 곳이구나’ 하는 자각과 민중문학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지역에 분단된 사람들이 있으니까 분단의 의미와 통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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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인 어떤 걸 한번 해봐야 되지 않겠느냐, 시도 이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써야 되겠다 혹 은 써줘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바이마을을 찾아가 나이 드신 분들 인터뷰도 많이 했어요.”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조명하다
1980년대 이상국의 시는 당면 현실을 반영하는 비판적 리얼리즘 경향이라는 평을 받았 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 격동의 시대 물결이 잦아들면서 이상국 시인의 시는 또 다른 모 습으로 변모했다. 작가가 시대적 소명이라는 압박에서 벗어나서인가,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던 시인의 시선과 태도가 달라졌다. 이때부터 이상국 의 시는 좀 더 따뜻하게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혜안이 느껴졌다. 고달픈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삶을 위로받는 포근한 고향의 정서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인 1998년에 발간한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에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국수가 먹고 싶다」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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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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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상국 시인은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면서 시집으로 2005년에는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2012년에는 『뿔을 적시며』, 2016년에는 『달은 아직 그 달이다』, 2021년에는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을 출간했다. 그리고 2019년에는 강원문화재단의 지원 으로 『국수-이상국 문학자전』을 펴냈다. 지난 2020년에는 『땅콩은 방이 두 개다』라는 동 시집도 펴냈다. 문학적 성취도 인정받아 시인으로서 영예로운 상도 여러번 받았다. 백석문화상(1991년), 정지용문학상(2012년), 박재삼문학상(2013년), 민족예술상(1999년), 현대불교문학상 (2014년) 등을 수상했다.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백담사만해마을 운영위원장, 한국민족예 술인총연합 강원지회장, 설악신문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역할 할 터
시인 이상국에게 양양과 속초는 어떤 곳일까? 이상국 시인에게 고향 양양은 많은 시적 영 감을 주는 곳인데 반해, 속초는 그렇지 못하다. 시인은 자신에게 양양은 어찌 보면 태어나 서 유년 시절만 보냈을 뿐이며, 속초는 자신이 성장하고 지금도 생활하는 도시로 자신의 삶에서 비중이 크다고 봤다. 그러나 정작 속초는 시상이 떠오르는 곳이 별로 없어 미안하 기까지 하다
“이상하게도 이곳 속초에 특별한 장소에서 영감을 받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가끔 그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양양에 관한 시는 엄청 많아요. 양양의 풍물, 장소, 사람 등. 속 초에 관한 시는 청호동에 관련 시가 다수 있는데, 그건 내가 80년대 분단문학이나 민중문 학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드나들면서 의도적으로 쓴 거죠. 속초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 소나 사람에 대한 것이 별로 없어요. 이걸 보면 전통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고 느껴져요. 예 를 들어 여기 향교가 하나 있다든가 저기 가면 500년 된 나무가 있다든가 하는 것들이 어릴때다 우리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들인데. 속초는 전통적인 도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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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시인은 속초에서 비판적 지성 역할도 열심히 하고, 문화예술 진흥 활동도 꾸준히 펼 쳐 왔다. 1990년에 창간한 설악신문 고정칼럼을 통해 잘못된 지역사회를 바로잡는 글을 계 속 써왔다. 민예총 강원도지회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1996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속초 아바이마을 백사장에서 제1회 통일문학제를 개최했다. 이때 고은, 신경림, 김규동, 민영, 염무웅 등 민족문학 원로들이 대거 참가했다. 2018년부터 설악문화예술포럼 회장을 맡아 해마다 문화예술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올해도 지난 11월 11일 청호동 오징어할복장에 서 ‘망향의 바다, 갯배의 노래’ 문학콘서트를 열었다. 지난 2018년부터 5년 간 ‘속초문화예 술대학’ 학장을 맡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해 왔다. 일흔 나이가 훌쩍 넘었음에도 이상국 시인은 아직 많은 일을 꿈꾸고 있다. 앞으로도 속초에 문화예술의 훈기가 느껴지도록 자신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다.
“속초에는 대학이나 기타 시민들의 정신세계나 정서를 안정시켜주면서 이끌어가거나 할 자원이 없어요. 지식사회에서 인적·지적 인프라가 너무 약해요. 그래서 어떤 가치관의 문 제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혼돈이 심하다고 봐요. 문화적인 면에서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구도가 만들어져야 해요. 그 일례로 어디 조그마한 시군에 가도 문화예술회관이라는 게 있 고, 소극장도 있고, 온갖 문화단체가 다 입주해 있거든요. 속초에는 연극하는 사람들 전용 소극장도 없고, 덩그러니 대공연장만 있어서 작은 공연은 들어가서 할 수도 없어요. 문화예 술단체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들이 문화단체나 연구소를 만들어 역사와 전통 을 이끌어 나가도록 뒤에서 도와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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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시인은 천생 글쟁이다. 한학을 해 동네 사람들을 글로 도와주던 아버지, 동네 초상집에서 눈물 섞은 곡으로 슬픔을 달래주길 잘 했던 어머니. 부모의 성정과 기질을 이어받아 남들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는 글쟁이 시인이 되었다. 이상국 시인은 “아직도 나는 어릴 적 살던 집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도 돌아가고 싶은 곳을 들라면, 바로 고향집이라고 시인은 덧붙였다.
이제는 그 소도 아버지도 다 졸업했다고 이 도시의 시민이 되어 산 지 오래인데도 우리 소 잘 먹던 풀밭 만나면 한 짐 베어 지고 그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최윤성
칠성조선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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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씬(Scene)*을 그려가는 속초이스트
청초호 호숫가에 맞닿아 있는 칠성조선소는 1950년 초에 원산조선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수산업이 호황이었던 시절 주로 소형 목선을 제작하고 수리하는 일을 도맡았다. 3대 칠성조선소 최윤성 대표는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 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곳은 관광객에게도, 속초 시민들에게도 ‘핫플’이다. 속초의 유명 카페로 잘 알려졌지만, 단순한 카페로만 알려지기에는 정말 아까운 곳이다.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공터에 남겨놓은 거대한 철물들과 완성한 선박을 뭍에서 호수로 옮겼던 ‘보존된’ 철로가 칠성조선소의 영혼이 담긴 상징물이라는 것을.
속초씬(Scene): 인디씬(Indepent Scene)이라는 용어를 응용한 것으로 독립적인 문화 유형을 의미한다. 속초씬은 속초만의 지역적 특성이 돋보이는 문화 형태를 지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배가 주는 의미
어린 시절 어른들을 통해 보고 들은 ‘배’는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도구’였다. 그 시절 아버 지들은 크고 작은 단단한 배를 이끌고 자식들의 끼니를 채워주었고, 당신들보다 더 나은 삶 을 살아보라고 열심히 공부시켰다. 어른들의 생업을 위한 공간인 조선소를 놀이터 삼아 아 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뛰놀았다. 배와 가까운 곳에서 놀았던 것이 기억 깊은 곳에 새겨져서 그랬을까, 그는 무의식중에 배와 놀이를 연결 지었을지도 모른다. ‘재미’로서 배에 의미를 두는 레저 보트를 접한 최윤성 대표는 그것에 크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배 만드는 법을 배 우기 위해 떠난 미국 유학 중에 경험한 장면들은 그의 꿈을 더욱 구체화했다. 그곳의 아버 지들과 아들들은 함께 목선(木船)을 매만져보며 즐거움을 공유했다. 직접 만든 보트를 타고 생계와는 상관없이 그저 유희를 즐기는 모습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칠성조선소 자리에서 레저 보트 제작 사업을 처음 시도했던 ‘와이 크래프트 보츠’는 가업을 잇는 첫 시도였다. 하지만 열정과는 다르게 현실은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았고, 레저 보 트 사업은 잠시 미루어 두었다. 조심스럽게 물어본 주제에 대해 실패한 경험이 아닌 훗날의 계획이라고 답변하는 것을 듣고, 조만간 속초에서도 아이와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심이 생겼다.
논다는 것
그는 속초의 여느 아버지들처럼 자식을 배부르게 해주는 것에 진심일 뿐만 아니라 함께 노 는 것에도 진심이었다. 칠성조선소 카페 공간 건너편에는 ‘플레이 스케이프(Play scape)’ 가 설치되어 있는데 아들이 대여섯 살쯤에 제작한 목조 놀이터다. 위태위태한 듯 높낮이 가 다른 외나무다리가 지그재그로 엮어져 있고, 아이들은 이 기둥 저 기둥에 매달려서 논 다. 용감하게 뛰어내린 아이들은 작은 언덕처럼 만들어놓은 세모진 나무 단상에 뜀박질해 올라간다. 이날도 어린이 한 명이 가장 꼭대기 모서리에 중심을 잡고 서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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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도 여느 속초 어린이들처럼 아빠가 직접 만들어준 놀이터에서 신나게 달렸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바다를 어려워했던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줄었다며 그의 얼굴 에 약간의 그늘이 졌지만, 이내 “요즘에는 서핑에 취미를 갖더라고요, 얼른 아들이랑 같이 서핑하고 싶어요.”라고 미소 지었다.
제대로 놀이하는 법을 아는 최윤성 대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즐거울 기회 를 제공했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부터 뮤직 페스티벌 등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면서 큰 호응을 끌어냈고, 남녀노소와 반려동물들까지 함께 할 수 있도록 공간과 행사를 열었다. 2023년 가을에는 속초시와 함께 준비한 ‘동네심기’ 프로젝트를 통해 속초에서 활동하고 있 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예술가들이 칠성조선소 내에 팝업 스토어를 열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속초 시민들은 양질의 새로운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1인 서커스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 공연을 포함시켰고, 신선한 즐거움 과 감동이 있었다. 아마도 최윤성 대표는 퍼포머들과 보는 이들의 온전히 즐기는 표정을 포착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야 약간 원하는 그림이 그려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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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l 최윤성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모이는 공간
그는 칠성조선소라는 공간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최대한 그곳만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개인적인 작업보다 예술가들, 문 화 활동을 위한 플랫폼 구성에 더 관심이 많다. 그는 예전 선박을 지었던 조선소 건물 위층에서 창문을 내다보며 공간과 사업의 방향을 설명해주었다. “원래 저쪽 공간에서 생활하다가 정리하면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만들 고 싶었어요.”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아낌없이 내어주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현재 다른 형태로 실현되 고 있다. 과거부터 진행해오던 음악 공연과 2022년부터 진행된 ‘속초아트페어’가 바로 그 것이다. 무소속연구소와 협업으로 주최한 속초아트페어는 지역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선보 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고, 뿔뿔이 흩어져있는 작가들이 한곳에 모일 기회를 제공했 다. 두 해에 걸친 페어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시각 미술을 속초 시민들이 누릴 수 있었고, 다음을 기대하게 했다.
최윤성
칠성조선소에서 제대로 놀 수 있는 분위기를 구성해 놓은 그는 새로운 공간에서 또다시 놀 궁리를 꾀하고 있다. 혹은 이미 그곳에서 즐겁게 놀이하고 있었다.
아티스트 레지던스(Artist Residence) : 예술가들이 거주하면서 개인 작업을 하거나 단독 혹은 협업 프로젝트를 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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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를 기록하고 확장하다
사진제공 l 최윤성
“속초씬(Scene)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어요.” 로데오거리 바깥쪽에 위치한 청학동 거리는 부모님 세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했 다. 이곳에 있는 노포들은 최초의 속초 먹거리 골목이다. 닭갈비며 자장면까지 속초의 원 조 맛집은 여기 모두 모여 있다. 그 기록을 ‘동네사무소’라는 공간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오 래된 식당과 함께 나이 든 사장님, 부모 세대를 이어간 2세와 레트로 소품이 되어버린 아 직 쓸 만한 유선 전화기가 사진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실제 어린 시절 동네 이웃 아저씨, 아줌마의 기록을 이렇게 하나의 프로젝트로 남겨놓으니 기분이 묘하다고 했다. 특히 이 프 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와 인터뷰가 그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유의미한 시 간이었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 2층의 전시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기록 사진이 아닌 가공된 사진이다. 청학동 거리의 원조 맛집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집처럼 바람에 날려 뜬금없는 곳으로 똑 떨 어졌다. 어떤 식당은 점심시간만 되면 회사원들이 몰려오는 고층 건물 골목 사이에 콕 박혀 다가올 발걸음에 대비해 재료 손질 중일 것이다. 또 다른 노포는 앞마당에 뿌려둔 꽃씨가 꽃 을 피웠다. 노포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재해석한 사진 작품이 정말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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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에서 진행 중인 그리고 예정된 활동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직접 술을 빚고 요리하 는 실용적인 워크숍부터 새내기 DJ 교육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속초의 한 부분을 접하게 될 것이고, 자기도 모르게 ‘속초스러움’ 을 장착할 것이다. 최윤성 대표가 재밌다고 느끼는 속초의 이야기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것의 기록과 재해석, 그리고 고정된 지역색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계속해서 확장하 는 것. 속초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그는 속초에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있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 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나 그나마 여유를 찾았다는 그에게 이렇게 고향에 남아서 문화 다방면에 기반을 닦아 놓은 것에 성취감이 느껴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무언가 마무리되는 성취감보다는 그다음을 생각나게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 아요.” 그의 말에 성과보다는 과정을 아끼는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해 온 활동을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고, 성과의 목록이라기보다는 연장선에 있는 과정과 과정의 연속이다. (무 수히 많은 시작점이 있지만) 할아버지의 조선소를 시작점으로 삼아 예술과 배를 공부한 그 는 선박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어린 시절 속초의 한 동네를 놀이터 삼아 성장해서 는 외부의 즐거운 놀이거리를 고향으로 들고 돌아왔다. 어린 시절 향수가 있는 거리를 다시 기록해 외지인들에게도 선보인다. 얼기설기, 그러나 정말이지 균형감 있게 과거와 현재, 안 과 밖을 보기 좋게 연결했다. 그리고 계속 확장하고 있다.
“저는 저만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그의 말이 조금은 이해됐다. 목적을 향해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작고 소소한 것들을 챙겨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속초는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다. 청초호 주변은 아름다운 전망을 선점하기 위해 쉼 없이 개발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장소에 서 칠성조선소의 시간은 그곳의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음악과 미술이 있는 여유로운 박자 에 맞추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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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성 대표를 만난 날은 유난히 바람이 강했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옛 사무실 공간의 창문이 깨어질 듯 흔들렸고, 창문 너머에 보이는 갈대는 바람을 피해 납작 엎드려 있었다. 유례없는 가을 양간지풍(襄杆之風)*이 불안함을 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날따라 커다란 무지개가 종일 속초를 안고 있었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강풍에 휩쓸리듯 빠르게 변화하는 속초의 풍경, 그럼에도 무지개는 흐트러지지 않고 선명하다. 오늘의 무지개 같은 그 어떤 정신이 최윤성 대표가 그리는 ‘속초씬’일지도 모르겠다.
양간지풍(襄杆之風): 봄철 강원도특별자치도 양양과 간성 지역에서 자주 나타나는 국지적 강풍을 일컫는다. 특히 영동 중·북부 지방에서 4월에 강하게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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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 오경아 이 준
김남희(심바) 김신복(보보)
모래알 공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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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돕는 공간, 모래알
속초의 오래된 병원 2층, 수상한 공간 하나가 문을 열었다. 옛 사무실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는 시멘트 바닥부터 낡은 유리문과 바람이 새들어올 것만 같은 은색의 창문까지. 소품샵인지, 스튜디오인지, 작업실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은 복합문화공간 ‘모래알’이다. 사람냄새 나는 공간 ‘모래알’은 두 공간지기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모래알을 운영하는 김남희 대표와 김신복 씨는 각각 ‘심바’와 ‘보보’라는 활동명을 사용한다. 두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모래알에 모이게 되었을까? 모래알 같이 작고 반짝이는 순간들을 모으고 싶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모래알 공간지기 심바와 보보
김남희 대표(이하 ‘심바’)는 속초살이 4년 차에 다다른 어엿한 속초청년으로, 공간 모래알 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와 포토그래퍼로도 활동하고 있다. 디자인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사 진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는 타인이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발견하 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활동명 ‘심바’는 라이온킹의 주인공인 아기사자 ‘심바’에서 따온 이름으로, 작지만 강해보이고 싶은 무언가를 떠올리다 선택했다.
심바는 가족을 따라 속초로 왔다. 이모 일을 돕기 위해 속초로 먼저 이주했던 어머니가 오랜 만에 본가인 광주로 내려왔던 날, 헤어지기 전 보인 눈물에 이주를 결정했다.
“엄마가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였어요. 엄마가 큰돈을 벌거나 엄청난 성 공을 이루지 않더라도 ‘나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라는 경험을 이루게 해드리고 싶 어서 직장을 정리하고 속초로 올라왔어요.”
지금은 장사꾼이 다 된 어머니를 보며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어머니가 스스로 의 존재가치를 발견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은 공간 모래알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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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바의 제안으로 2023년 5월부터 속초살이를 시작한 김신복 씨(이하 ‘보보’)는 뮤지컬을 전공한 퍼포머(performer)이면서, 경기북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창작뮤지컬을 만드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움직임에 관심이 많은 그는 지금도 틈틈이 서울로 춤을 추러 오가곤 한다. 속초에서는 이전의 경험을 살려 문화예술교육 기획자와 강사로 활 동하고 있다. 보보는 ‘보헤미안’의 특성을 애정한다. 그래서 활동명도 ‘보보’라 정했다. 자 유롭게, 어딘가 구속되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는 지향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보보가 활동 명을 쓰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기존의 이름, 물려받은 역할, 사회적 지위들은 던져버 리고, 스스로 나의 위치와 지위를 확립해나가겠다는 신념을 담고 있다.
보보는 서울에 살면서도 항상 ‘언젠가 복잡한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그러다 2020년, 서울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청정지역 프로젝트’를 통해 속초살이 10개월을 시작했다. 완전한 정착은 아니었지만, 속초를 맛볼 수 있었다. 그 때 만난 인연이 심바였다. 10개월의 속초살이를 마무리하고 다시 치열한 서울의 삶으로 돌 아갔을 때, 심바에게 전화가 왔다. “공간을 만들 건데, 같이 할래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보보가 쌓아온 욕구들이 심바의 제안과 결합되면서, 단숨에 답이 정해졌다. “어? 좋은데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속초살이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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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존재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탐구의 공간
심바와 보보는 모두 정체성 탐구에 대한 호기심이 높다. 타인에 대해서도,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러다보니 평소에도 공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끊임없 이 나오고 있다.
보보는 처음 모래알을 열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것저것 뭔가가 너무 많았어요. 스 튜디오, 소품샵, 작업실까지. 그래서 이 공간이 어떤 곳인지 결론을 내지 못했어요.”
모래알에 대한 보보의 첫인상은 사실 심바의 바람과 맞닿아 있었다. 심바는 처음 공간을 열 었을 때, 이곳을 무언가로 규정하고 싶지 않아 ‘서로를 정의하지 않고 만나는 공간’으로 가 꾸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공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싶은 욕구가 생 겨났다. 공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큰 종이에다 마인드맵을 하듯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 을 가지기도 했다. 그 과정을 거쳐 찾아낸 첫 번째 해답은 이것이다. ‘개인이 가진 다양성 이 서로의 목표를 가지고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어 상생하기를 꿈꾸는 로컬문화플랫폼, 모 래알.’ 심바와 보보는 모래알을 찾아오는 이들이 온전한 존재로 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공 간으로 이곳을 운영하려 한다.
모래알의 시작은 ‘창작자들을 위한 작업 공간’이었다. 이제는 창작의 순간을 누리고 싶은 모든 사람을 환영한다. 창작활동으로 삶에 묻어 있는 생기를 발견하고픈 사람, 창조의 샘물 속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모래알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우리는 햇볕이 내리쬘 때 모래알이 반짝이는 순간을 모으려고 해요. 공간에는 누구나 무 엇이든 창작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어요. 아무런 준비 없이 와도 그림을 그 리거나, 밥을 해먹거나, 내 방을 위한 작은 소품을 만들 수 있어요. 반짝이는 마음들이 적절 한 유형의 형태로 제작될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책을 읽거나 향을 피우며 멍을 때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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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보드게임을 하며 공간을 누릴 수도 있어요. 항상 생산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가끔 은 아무것도 안해야 반짝거리기도 하니까요.”
모래알은 책방도, 공방도 아닌, 그저 ‘모래알’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가장 단 순한 정체성만 설정해두었다. 이 공간의 규칙이라면, 그저 정의되지 않은 서로의 존재를 지 지하고 응원하며 더 많은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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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의 특별한 문화예술교육
공간지기로 모래알을 운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이 있다. 지역에서 문화 예술교육자로 활동하는 일이다. 2022년 속초문화특화지역조성사업 ‘시민기획 문화실험실 OK활력소’를 통해 4회차의 짧은 프로그램 <몸맞춤>을 진행했다. 몸맞춤은 '본인이 원래 가 지고 있던 고유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춤을 춰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문화예술교육 프로그 램으로, 보보가 주강사로 나섰다. 즉흥움직임 ‘몸맞춤’은 속초에서는 꽤나 실험적인 프로그 램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모래알은 속초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2023년에는 강원문화재단의 디딤돌문화예술학교를 통해 <1인 낭독극 만들기 “Feel, Write, Read”>를, 지원사업 우리동네홀씨되어를 통해 <도시모험가의 탄생>을 운영했다. 모래알의 문화예술교육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모래알만의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인 낭독극 프로그램은 청소년과 청년을 대상으로 운영했다. 참여자들은 자문자답 대화 형식으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써내려갔고, 마지막에는 희곡 형식의 낭독극을 발표했 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다듬고 말로 발화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 이곳의 나’를 선명히 드 러내도록 이끌었다. 도시모험가 프로그램은 ‘나’와 ‘나의 도시’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10살도 채 안된 어린아 이부터 성인까지, 모험을 좋아하고 새로운 발견을 통해 시야를 확장하고 싶은 속초 사람들 을 대상으로 운영했다. 도시생태계를 개인의 고유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역의 고유성을 새롭게 정의해보고자 했다. 참여자들은 속초의 숨겨진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도시모험가로 서 도시의 이야기들을 채집했고, 그 모험의 결과를 전시 <당신은 지금, 어디에>로 풀어냈다.
보보가 추상적으로 뼈대를 만들면, 심바는 현실적으로 살을 붙인다. 긴 대화를 통해 프로 그램을 함께 다듬는다. 서로가 각자의 시선에만 갇혀있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 기획 의 과정은 늘 재미있다. 심바와 보보의 문화예술교육은 그들의 삶 전체와 맞닿아있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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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고민, 정체성의 혼란, 고유한 세계관 등이 반영되어 오롯이 ‘모래알스러운’ 프로그램 이 탄생한다.
심바는 본인과 참여자간 욕구의 중간지점을 가장 중요시한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A를 말해도 B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프로그램 시작부터 오 해가 없도록 상당히 신경을 쓴다. 심바에게 문화예술교육은 이제 막 뛰어든 새로운 영역 이지만, 자꾸만 끌리고 재미있고 계속 하고 싶은 미지의 세계이다. 최근 지인에게 ‘자기만 의 언어와 그림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에 큰 울림을 받았다는 그는 돌고 돌아 결국 나를 찾아가는 여정 때문에 문화예술교 육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보보는 ‘착한 문화예술교육은 하지 말자’를 기획의 모토로 삼는다. 보편적 선함보다, 자신 만의 신념이나 시선이 확고해야 한다. 실제 뮤지컬 현장은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치열한 현장이 펼쳐지지만, ‘교육’이란 단어가 붙는 순간, 늘 환대하고 양보하고 밝은 분위 기로 끝내야할 것만 같은 강박에 빠지기 쉽다. 그것이 정말 교육적일까. 그래서 보보는 청 소년 대상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에도, 감정이나 생각의 혼란을 충분히 느끼고 경험할 수 있 는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해왔다.
모래알은 ‘질문을 남기는 프로그램’을 만들어간다. 나와 삶에 대한 질문을 계속 갖게 만들 고,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참여자 스스로 풀어가야 할 숙제를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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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은 지금, 만남의 광장
모래알이 만난 속초사람들은 모두 꿈이 많았다. 어떤 것을 얘기하면, 거기에 따라오는 자신 들의 꿈을 마구 펼쳐놓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들의 숨겨진 꿈이 하나둘씩 끄집어져 나왔다.
그래서인지 모래알에서는 늘 만남의 광장이 펼쳐진다. 타코야키나 샤브샤브 파티가 벌어지 고, 때로는 지역의 기획자들이 모여 서로의 고충을 토로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두 공간 지기는 이런 소소한 순간들을 굉장히 애정한다. 공간을 기반으로 새로운 인연들을 계속해 서 확장해 나간다. 사람들을 초대해서 같이 밥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꿈을 나눈다. 이렇 게 맺어진 인연들과 새로운 기획을 시도하기도 한다. 개인으로서는 인간관계를 늘리는 사 람이 아님에도, 공간이 주는 힘으로 사람들을 품는다.
“결이 맞는 사람들을 알아가게 되는 순간들이 의미 있고 소중해요. 그들과 교류하며 얻는 영감들, 그 영감으로 새로운 일들을 도모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들이요. 2023년 4월만 해 도 달력에 아무 일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하루하루 참 바쁘게 흘러가는 것도 신기해요. 살 아갈 힘을 얻어요.”
속초가 주는 기쁨
심바와 보보는 모두 속초의 자연을 애정한다. 심바는 자연에서 영감을 자주 받는다. 파도 하 나를 볼 때도, 잔잔한 파도, 강한 파도, 반짝이는 파도 … 매 순간의 파도가 모두 다르다. 가 만히 자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으로 오랜 고민의 답을 찾기도 한다. 자연이 주는 영감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
보보가 애정하는 영랑호는 속초가 선사해준 즐거움이다. 바쁜 관광도시 속 숨겨진 보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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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고요함이 좋다. 속초를 생각하면 활기찬 관광시장을 떠올리게 되지만, 예상 외로 고즈 넉하고 조용한 시골의 숨겨진 호수를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도 잔잔한 기쁨으로 남았다.
보보는 지난여름, 바다수영을 원 없이 했다. 도시에서는 꿈도 못 꿀 만큼 자주, 마음먹을 때마다 바다로 나갔다. 바다수영을 마음껏 하는 순간들이 일과 생활 모두에 동력이 되어 주었다. 특히 장사항의 작은 바다는 숨겨진 바다수영 스팟이다. 바다수영을 하면서 수중 정화활동도 함께했다. 보보의 삶과 가장 가까이 맞닿으면서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환경 실천이었다.
속초에 와서 통오징어찜을 처음 먹고,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는 보보. 서울에서는 알지 못했던 도루묵이나 양미리구이 같은 바다 음식을 새롭게 맛보는 것은 속초에 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속초에서만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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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l 모래알
포근함이 있는 속초, 사랑이 있는 세상
모래알에게 속초다움은 무엇일까? ‘도시모험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속초다움’에 대해 고민해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속초가 다른 지역처럼 하나의 정체성이 생길 만큼 시 간이 쌓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현재진행형’. 속초는 정체성을 만 들어가는 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속초 시민들이 자신의 삶과 지역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며 살아갔으면 한다. 그것이 속초를 속초답게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모래알이 속초에 바라는 것은 단순하지만 중요하다. 심바와 보보 모두 이주청년 으로 속초에 정착하기 위해 애써왔다. 그들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도 속초가 좋아 이곳으로 이주하고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속초가 정착을 시도하는 사람들에 게 더 포근한 도시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발판이 되어줄 수 있 는 정책과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공간들이 밑받침되었으면 좋겠다. 실향민 세대부터 이주 민이 존재했던 ‘이주민의 도시’ 속초가 척박한 땅이 아닌, 포근하고 따뜻한 땅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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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보기 위해 한 알의 모래알을 들여다보라던 먼 나라 시인의 노랫말처럼, 작은 알갱이 속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어 이것저것 뚱땅뚱땅 시도해보는 곳. 서로 다른 성격과 취향을 가졌지만 비슷한 결을 가진 두 사람, 그들이 속초에서 쌓아가는 작고 반짝이는 모래알 같은 순간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경아
가든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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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가 품은 ‘오경아’라는 이야기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고 높은 날이었다. 설악산 아랫자락 작은 동네는 수확한 검은콩을 바닥에 늘어놓고 햇볕을 쬐어주며, 가을 냄새 풀풀 나는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수수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마을 길을 걸어 오르니 오늘의 하늘색을 닮은 지붕이 눈에 띄었다. ‘도문자작’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파란지붕 집은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의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정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나는 어떤 대화의 접점을 가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 시구가 새겨져 있는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잔잔하고 수수한 색감 덕에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켜켜이 쌓여있는 장작더미, 가을바람에 부대끼는 마른 풀들의 모임, 듬성듬성 보이는 자작나무가 이곳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모과나무가 가을의 향수를 한 층 더 끌어냈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속초에서 거주하며 전국구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예전에는 가든 디자이너라는 직업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방송작가 일을 했다. 16년간 라디오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영예의 작가 상까지 받았다. 훌륭한 재능과 커리어를 온전히 내려두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정작 본인은 창작의 고통이 꽤 컸다고 했다. “오랜 기간 방송작가로 있었지만, 무언가 창작하는 건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어요.” 글을 쓰는 와중에도 때때로 집 앞 정원에서 나무와 꽃, 풀들을 매만지고 다듬고 있는 자 신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나는 이곳 정원에서 힘을 받고 있구나.’라고 깨달았다. 하던 일 을 내려놓고 갑작스럽게 영국으로 가든 디자인 유학길을 떠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는 매우 뜬금없어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스며 든 계획이라고 했다. ‘정원’이라는 키워드만 갖고 간 유학 생활은 다른 모양으로 창작하는 법을 연습하는 고통 스러운 시간이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CAD(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는 프로그램)며, 컴퓨터 그래픽 툴을 배우는 것은 그야말로 ‘도전’이었다. 작가 일을 하며 받는 스트레스가 컸다고 했던 그는 현재 하는 정원 일 또한 이전에 하던 일과 닮아 있는 점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우습죠,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또다시 창작이라니.”
속초에 뿌리내린 지 10년이 된 2023년에는 속초와 어울리는 새로운 프로젝트인 ‘옥토퍼 스 가든마켓’을 처음으로 시행했다. 첫 번째 일정은 노학동에 위치한 문화공간 설악산책에 서 강원도 지역 셀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두 번째는 속초 칠성조선소에서 성황리에 종 료되었다. 제목은 애정하는 밴드인 비틀즈의 ‘Octopus’s Garden’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 로 중의적인 의미가 있어 매우 재미있었다. 마켓이 열리는 지역이 ‘문어(Octopus)’가 많 이 잡히는 속초이기도 하고, 정원 꾸미기 좋은 옥토(沃土)를 가진 속초에서 진행되는 대표 적인 정원 마켓이 되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정원사 문어가 주변 식물을 알뜰살뜰하게 돌보 고 있는 포스터는 참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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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추구하는 정원의 형태는 생활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속초에서 생 활정원에 관한 수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개인 정원이 다소 생소한 우리나라에서 는 좁은 길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로망을 현실로 연결해주는 햇살 같은 역할을 하고 있 다. 2015년부터 이어가고 있는 ‘오경아 정원학교’는 화려하고 거창한 정원을 꾸미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지금 할 수 있는 정원 가꾸기를 알려준다. 그가 그토록 바라는 생활 에서 즐길 수 있는 정원 구성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고 누구나 저마다의 스트레스를 안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정원은 회복 의 장소라고 했다. 내가 가꾼 정원에서 받는 기운은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도 강하다고 했다. 높은 회색 건물 하나 없는 중도문 작은 마을, 조그만 뜰에 앉아서 보는 커다란 보름달은 세상살이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희미하게 해준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 서 풀을 뽑고 물을 뿌리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잠시나마 쉬게 해준다. 이런 것이 그가 정원 일을 배우고 싶은 이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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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일 수 밖에 없는 이유
7년간의 영국 유학을 마치고 선택한 곳은 속초였는데, 그 이유는 속초가 국내에서 지리학 적으로 가장 훌륭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단 동해안에 위치한 속초는 잘 알려진 바 와 같이 여름에는 선선하고 겨울에는 온화한 기후가 특징인데, 이점이 정원 구성에 매우 유리하다고 한다. 이곳 속초는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가 선정한 국내 최적의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속초 자체를 내가 살고 싶은, 가꾸고자 하는 ‘내 정원, 내 집’으로 여기 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속초의 지리적 특성을 이야기하며 휴대폰의 지도 어플을 켜서 대한 민국 지도를 보여주었다. “속초의 바다는 바다 안의 호수에요.” 어리둥절한 내 표정에 속초가 정원으로서 알맞은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수 많은 생명체들이 모여 살기 얼마나 좋은 지역인지 강조했다. 속초는 동해안 여느 지역보다 도 다양한 수심을 가진 곳이고, 이로 인해 다양한 어종이 서식한다. 여러 가지 해산물이 가 득한 바다에 접근하기 좋은 지역이 속초인 것이다. 이러한 환경 덕에 속초가 어업으로 크 게 발전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심지어 설악산을 통해 7, 80년대부터는 관광 지로서 급부상했다. 현대에 와서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안타까운 점도 이야기 나누었지만, 이 모든 흐름이 속초가 그만큼 좋은 곳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그의 쾌활한 결론에 마 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먼발치 한반도 지도를 보면서 속초를 바라본 것은 신선한 접근이었고, 그의 시선을 통해 속 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인 설명으로는 한반도 통틀어서 북한에 위치한 원산 또한 가든 디자이너들에게 손꼽히는 지역이라고 했다. 문득, ‘속초이스트-오경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통일이 조금 지연되어야겠다는 우스운 이기심이 살짝 발동됐다. 속 마음으로 엉뚱한 욕심을 내고 있을 때, 그는 속초는 산과 바다를 모두 가까이서 둘 수 있는 최고의 지역이라며 웃음 지었다. “제가 두 딸에게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해요. 너희들 속초 로 오면 한 명은 바다를, 하나는 산을 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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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담는 ‘공간’이라는 것
‘속초 뒷담화’를 시원하게 주고받고 나서는 집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푸른 지붕의 오래된 한옥의 역사는 매우 흥미로웠다. “이 집이 품고 있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을 거예요.” 1970년대 말 양양에서 170년 된 한옥 지붕이 속초로 옮겨왔고, 도문동 한켠에 서까래며 대들보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10년 전 그가 영국 유학길에서 돌아와 속초에 짐을 풀기로 결심했을 때, 이 집은 부엌까지 잡초가 무성히 자란 폐가였다. 운 좋게도 사람의 온기를 다 시 품은 이 오래된 지붕 아래 지나간 삶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사람은 집을 소유하는 듯하지만, 그저 거쳐 가는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지점을 짚어준 그를 통해서 ‘공간’에 대한 존중을 배울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가든 디자이너는 정원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진하게 끼고 있던 색안경이었고, 적어도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는 집이든 정원이든 사람은 그저 보조하는 역할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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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l 오경아
작가라는 숙명
그는 본인의 특기인 글솜씨로 정원 관련 서적을 다수 출판하여 정원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가장 최근에 출판된 서적 ‘정원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물어보았다. “제가 기억하는 정원의 기억이 아니고, 정원이 갖고 있는 기억이라는 뜻이거든요.” 집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집이 사람을 품는다고 하는 맥락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었고 사 람이 아닌 집과 정원에 주체성을 부여하는 세계관이 참 인상 깊었다.
어쩌다 보니 다시 창조적인 일을 다시 하게 된 그는 끊임없이 영감을 받기 위해 전 세계 곳 곳의 정원을 방문한다. 그저 예쁘고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눈에 담아오기보다는 이 정원 이 가진 이야기, 머물고 간 사람의 흔적들을 주로 수집하고 공부한다. 시각적인 매력도 중 요하지만, 정원 곳곳에 스며있는 작은 의미들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다. 정원에 대한 정보를 대중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쉽고 편안하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딱딱한 문어체가 아 닌 말로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친절하고 담백한 그의 말투를 글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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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자택 정원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장소인 툇마루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니 소박하면서도 고귀한 느낌을 받았다. “정원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정원은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내심 속초 시민으로서 그가 속초를 거점 삼아 활동하는 것이 뿌듯했고, 오경아를 품고 있는 속초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
아이언바 대표, 팀 밀당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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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고(push) 당기며(pull) 더 건강한 속초를 만드는 중입니다
속초 해수욕장 송림 앞 철봉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인다.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른 그들, 심지어 유치원생 꼬마까지 함께 있다. 철봉에 매달려 팔을 당기고, 바닥을 지지대 삼아 땅을 밀어낸다. 한 사람이 밀고 당기면, 다른 사람들은 주변에서 그를 응원한다. 포기하지 못하도록 “조금만 더! 하나 더!”를 외치는 따뜻한 격려도 빠지지 않는다. 운동 베테랑부터 철봉을 처음 잡아보는 초보자까지, 맨몸운동으로 함께 모인 이들은 속초 유일의 맨몸운동팀 ‘밀당’이다.
작은 취미하나로 속초에 큰 변화를 만들어가는 팀 밀당
2022년 시작된 팀 밀당은 벌써 100명이 넘는 팀원을 자랑하는 속초 최대 규모의 운동모임 이다. 매주 화요일과 일요일 저녁, 바다가 보이는 철봉 앞에서 정기모임을 가지는 밀당. 작 은 도시에서 100여 명의 사람들이 운동을 위해 모인 모습이 낯설다. 함께하고 싶은 팀 밀 당의 매력은 무엇일까? 밀당을 처음 시작한 사람, 작은 취미 하나로 속초에 큰 변화를 만들 어가고 있는 밀당의 팀장 이준 대표를 만났다.
속초를 꿈꾸다 시작된 진짜 속초살이
그는 속초에 도착한 일자를 정확히 짚어냈다. 2020년 12월 3일. 그가 아내, 딸과 함께 속 초로 이주한 날이다. 속초살이 만 3년 차에 접어든 85년생의 그는 현재 팀 밀당의 팀장이 면서, 맨몸운동센터 아이언바의 센터장이다. 직업은 아이언바 대표, 밀당은 가장 큰 취미 생활. 청년 커뮤니티 활동도 여러 가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으며,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것들도 몇 있다.
그는 직업군인 출신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직업군인이 되고서는 진도부터 연천까지 이동 해 다녔다. 군 생활 중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대한 후에는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제대한 후 아내는 군무원의 길을 택했다. 아내가 첫 발령지를 선택해 야 하던 시기, 이준 대표는 꿈꾸던 동해바다를 택했다. 전국 각지의 근무지 중 강원도 고성 22사단을 1지망으로 썼다. 속초로 오고 싶은 그의 마음을 아내가 존중해 준 결과였다. 왜 하필 속초였을까? 군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았지만, 한 번도 동해안으로 발령받지 는 못했다. 그가 찾아본 속초에는 산과 바다가 모두 있었고, 너무 시골스럽지 않으면서도 도시 같은 모습을 갖춘 곳이었다. 운명 같이 만난 아내의 1순위 발령지 덕에 고성 옆 속초 에 터를 잡게 된 부부. 언젠가 또 떠나야 할 상황이 오겠지만, 지금은 속초가 너무 좋아 떠 나야 할 상황을 막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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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만난 철봉, 그리고 시작된 밀당
사진제공 l 이준
속초로 이주한 뒤 그의 루틴은 한결같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오전 내 집안 일을 끝내고 매일같이 밖으로 나갔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속초의 모든 철봉을 찾아 다니는 일이었다. 운동할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낯선 속초에서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 는 속초의 모든 철봉을 다 가봤다고 한다. 그때의 기록을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려두기도 했 다. 운동이 가능한 철봉 위치 좌표부터 주차 여부까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오롯이 그 의 발품과 집념이 담긴 자료다.
철봉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그는, 속초해변 송림 안에서 우연히 철봉을 발견했다. ‘바다 앞에는 왜 철봉이 없을까’ 생각만 하던 그의 상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 며칠은 송 림 철봉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운동하는 만족스런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인가 턱걸이를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어느 커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둘, 셋..” 모르는 사람이 그 의 턱걸이 수를 세거나 빤히 그를 구경하는 일들이 생겼다. 낯가림이 심한 그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도저히 속초해변 철봉에서 혼자 운동할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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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뷰 철봉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단 한 명’의 운동메이트를 구하기 위해 당근마켓에 글을 올렸다. ‘맨몸운동 같이 할 사람 1명 구함’. 그가 최초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불과 며 칠 전 그와 같은 글을 올린 사람을 찾았고, 두 사람은 운명처럼 밀당의 첫 멤버가 되었다. 운동 메이트를 형성한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열어줄 기회가 찾아왔다. 속초문화특 화지역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된 ‘2022시민기획 문화실험실’이 모집 중이었던 것. 팀명 을 정하고 마지막 날 접수를 완료했다. 팀 밀당의 시작이었다.
여름을 뜨겁게 달군 밀당의 ‘머슬비치챌린지’
밀당은 2022년 9월 시민실험실을 시작으로 결성되어, 현재 1년 4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2년 연속 시민실험실 우수팀에 선정됐고, 멤버는 100명을 넘겼으며, 각종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은 지난 여름의 ‘머슬비치챌 린지’였다.
밀당은 2023년 여름, 속초시 썸머페스티벌의 에코바캉스 메인 프로그램 ‘머슬비치챌린지’ 를 운영했다. 그들은 챌린지를 위해 사각철봉을 직접 제작해서 바다에 심었다. 무거운 철 봉을 만들고 옮기고 땅을 파 심으면서도, 열정이 넘치던 그들은 힘든 줄도 몰랐다. 밀당은 6일간 속초해수욕장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과 함께 턱걸이 챌린지를 진행했다. 머슬비치챌 린지는 밀당을 대외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첫 계기가 되었다. 한동안은 속초해변을 걸 어 다니면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밀당 팀원들은 머슬비치챌린지에 온 힘을 다했다. 교류하고 있던 인플루언서들에게도 도 움을 청했다. 맨몸운동 유튜버부터 국내에서 가장 활동력 있는 프로 맨몸운동팀 ‘저스트펀 크루’까지, 많은 사람들이 밀당을 응원하기 위해 뜨거운 여름을 함께해주었다. 모래사장에 철봉을 심어본 경험, 다른 팀과 협업을 진행한 경험, 많은 사람 앞에서 행사를 진행한 경험 은 밀당을 내부적으로도 단단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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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몸운동을 사랑하는 이들의 공간, 아이언바
야외에서 운동을 하다 보니 날씨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이준 대표를 포함하여 어린 자 녀를 데리고 나오는 아빠들이 추위나 모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2022 년 겨울에는 한파를 피해 정기 운동을 두 달 정도 중단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일명 ‘속초 똥바람(속초의 강한 바람을 일컫는 말)’을 피해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공간에 관한 아이디어가 나오자마자 이준 대표의 추진력에 불이 붙었다. 공간을 찾고, 철봉을 직접 설계했다. 팀원들도 함께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언바의 오픈을 함께 준비해 주었다. 밀 당이 함께 만든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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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바는 현재 속초의 맨몸운동 체육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평소에는 맨몸운동 수업이 열리고, 정기모임이 있는 날에는 오픈 짐으로도 운영된다. 아이언바가 있기 전에는 비가 오 는 날이면 레슬링장을 대관해서 정기모임을 진행했다. 밀당 안에도 운동할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밀당과 아이언바 운영을 함께 한다면 시너지가 많이 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이언바는 밀당의 정기모임 공간의 역할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특히 지금같이 추운 강원도의 겨울에는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이제 밀당은 실내와 실외 공간 을 다 활용하여 언제든지 모임을 이어나갈 수 있는 팀이다.
꾸준함의 대명사, 그는 밀당의 팀장
밀당은 ‘밀’고, ‘당’기는 운동을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바닥과 철봉을 밀고 당기 면서, 운동을 하는 것이다. 밀당은 주 2회, 화요일과 일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속초해 변 송림 내 철봉에서 정기모임을 가진다.
그를 보면 ‘꾸준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밀당을 만든 뒤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늘 정기 모임의 자리를 지켰다. 운동을 하러 올 단 한 사람을 위해서다. 밀당 정기모임을 처음 열었 을 때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한 가지 규칙이 ‘혼자라도 그 시간에 그곳에 가 있는 것’이었다. 어느 누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밀당은 그 자리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다보니 자연스레 함께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혼자서 운동했던 날은 단 한 번, 그 외에는 늘 서로가 서로의 운동메이트가 되어주었다. 밀당은 팀원들의 소 개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관계가 더 빨리 끈끈해진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 으니, 그 옆의 좋은 사람들이 더 찾아든다. 운동이 힘들어도 사람이 좋아서 계속 밀당을 찾 는 팀원들도 많다. 특히 건강하게 에너지를 분출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텃세도 없 고 흔히 말하는 ‘물을 흐리는 사람들’은 남아있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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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당의 미래, 앞으로의 꿈
밀당은 이제 전국적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팀원들과 함께 나간 전국대회에서는 세 번 모두 입상을 했고, 타 크루와의 교류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이제 대외적으로 맨몸운동을 하 는 선수나 취미인이라면 밀당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지금 상태 에 무척 만족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보다, ‘열정적인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 겠다고 했다. 정기모임에는 15~30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앞으로는 유령팀원을 줄이고 열 정팀원을 늘리는 게 목표다.
그의 또 다른 꿈은 해변에 철봉공원을 만드는 것. 속초의 바다 앞에 철봉공원을 조성하고 그 이름을 ‘밀당’이라 붙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지역에서 조성 하는 공간은 얼마나 잘 사용될지가 중요한데, 이미 수요를 가득 안고 있는 밀당이 있으니 공간만 생긴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건전한 취미생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 자취를 꾸준히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밀당의 영향력으로 언젠가 철봉공원이 세워지는 날 이 오지 않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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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l 이준
다양성의 도시에 정착한 사람
속초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단번에 ‘다양성’을 택했다. 정말 많은 사람이 각자의 지 역에서 이곳 속초로 와서 정착한 것을 봐왔고, 한편으로는 ‘진짜 속초사람은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여러 이유로 이곳 속초에 모였다. 잠 깐 왔다가 이곳이 좋아 정착한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준 대표가 바라보는 속초의 가장 큰 정체성은 ‘다양성’이다.
“지금의 속초는 오히려 ‘속초의 전통성’을 찾아가는 게 더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속초의 아바이 마을부터도 ‘실향’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향을 잃었다는 말이잖아요? 이곳 속초가 제2의 고향인 것이지, 처음부터 속초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여기서부터 ‘다양성’이 존재한 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속초사람과 속초를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다 양한 문화가 섞여왔겠죠. 그러니 그 안에서 ‘온전한 속초의 것’을 찾는다는 게 더 어렵고 이상할 것 같네요.”
밀당을 통해 이미 속초의 다양성을 한껏 경험 중인 이준 대표. 예외가 없을 정도로, 속초는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모여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 속초살이 3년차로서 터전 을 잡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잡았고, 계속 잡아가고 싶은 사람’이라 답했다. 속 초에 대한 그의 애정이 한껏 묻어나오는 대답이었다.
속초를 애정하는 몇 가지 이유
이준 대표는 9살 딸과 함께 세 가족이 행복한 속초살이를 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속초 의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산으로 가면 산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콘텐츠가, 바다에서는 또 바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고, 완전한 시골도 아닌 도시의 형태이기 때문에 하 고자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더라도, 어린
동쪽으로 온 사람들 102
딸아이를 둔 젊은 부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가족들과 함께 하기에 건전한 콘텐츠를 굉장히 많이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속초는 가족이 함께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특히 그의 속초살이를 더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운명처럼 만난 그 곳, 밀당의 첫 시작을 만 들어 준 속초해변 송림의 철봉이다. 해변을 바로 앞에 둔 철봉은 전국을 찾아봐도 손에 꼽 는다. 송림은 보호구역인데, 언제, 누가, 어떻게, 왜 그곳에 철봉을 설치한 건지 궁금할 때 가 많다. 그는 ‘누군가는 저처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철봉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하 며 웃어보였다.
마지막으로 속초 시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마디를 남겨달란 말에 내놓은 대답은 내 머리 를한대친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운동과 삶을 너무 구분 지어 말하는 것을 굉장히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너 운동하니?’ 물어보는 것 부터도요. 어디를 가기 위해 걷는 행위, 무언가를 쓰는 행위, 밥을 먹기 위해 꼭꼭 씹는 행위 등이 이론상으로는 신체활동이지만 누군가에겐 운동 이 될 수 있거든요. 일상의 많은 부분이 이미 운동이고, 또 운동이 될 수 있어요. 유리창 닦 기, 바닥 닦기, 양치질, 젓가락질, 이런 것들이 모두 근신경계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에요. 운동을 특별한 무언가라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너는 운동을 하 니?’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는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운동량을 채우고 있니?’라고 물어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그만큼 운동과 삶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저는 그래서 맨몸운동이 좋아요. 어디서나 할 수 있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특별한 곳에 가서 특 별한 활동을 하는 것만 ‘운동’이라 생각하지 말고 ‘나는 언제 어디서나 운동할 수 있는 사 람’이라 생각했으면 해요.”
그렇다. 밀고 당기며 더 건강한 속초를 만들고 싶은 사람, 그는 팀 밀당의 대표이다.
103 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지키는 사람들
김성하 김안나 김진호 심삼옥
김성하
속초사자놀이보존회 회장
지키는 사람들 106
107 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속초의 마지막 자존심, 속초사자놀이를 지키다
‘속초사자놀이’는 강원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이면서, 2022년 11월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속초의 유서 깊은 문화재이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연희한 북청사자놀이가 실향민 고유의 몸짓으로 자리 잡아 변형된 ‘속초사자놀이’. 누군가는 힘써 지켜내야 할 우리의 문화재를 위해 두 팔 걷고 뛰어든 사람들, 속초사자놀이를 ‘속초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부르는 속초사자놀이보존회 김성하 회장을 만나 속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실향민 2세대로서의 본분, 아바이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초사자놀이보존회 회장이면서 동시에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 일명 ‘아 사모’ 회장을 맡은 김성하 회장은 속초사자놀이보존회가 발족한 2003년부터 회장직을 맡 아 속초사자놀이를 지켜왔다. 본업은 디자인과 광고물을 제작하는 강원기획 대표이지만, 아바이마을을 위해 힘쓰는 사람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그는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 2세대이다. 실향민 하면 ‘억세고 강인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먼 저 떠오르는데, 서글서글한 눈웃음의 그는 실향민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처럼 보였다. 실제 로 그가 기억하는 실향민 1세대의 삶은 굉장히 치열했다. 어린 시절 그는 1세대 어른들의 고생을 가까이서 생생하게 지켜보며 자랐다. 반면 그 치열한 삶은 오히려 2세대들을 조금 더 유하게 만들었다. 김성하 회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김성하 회장의 외조모는 가지고 있던 배로 함경 단천에서 수백 명을 태우고 피난을 왔다. 그 작은 배에 수백 명이 탔다는 것이 어린 그의 생각에 쉽게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아마 ‘그 만큼이나 빼곡하게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온 것이 아닐까’ 그는 상상해보곤 했다. 외조모는 작은 배로 울진까지 갔다가, 고향 근처로 가서 기다리겠다며 이곳 속초로 올라와 정착했다.
김성하 회장의 부모님 또한 모두 함경남도 분들이어서, 그는 피난의 첫발을 내딛었을 때부 터 속초에 정착하기까지의 어려움을 모두 듣고 보고 자랐다. 속초에 처음 왔을 때는 청호 동에 나무가 너무 없어서, 미시령까지 나무를 하러 가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청호동은 자 원이 부족한 곳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청호동은 속초 시내와도 단절된 곳이었다. 청호동 사람들과 속초 시내 를 이어주는 유일한 수단은 ‘나룻배’였다. 지금은 관광객 사이에 ‘속초 갯배’라 불리는 작 은 나무배. 청호동 사람들이 속초 시내로 나갈 방법은, 갯배를 타고 넘어가는 길 하나뿐이 었다. 먹고 살기 위해 매일 오가던 작은 나룻배 위에서, 마주하는 얼굴들 사이 청호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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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연대감과 친근감은 더 높아졌다. 청호동 사람들에게는 나룻배 돈도 받지 않았다. 나 룻배를 모는 사람들은 단번에 청호동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청호동과 속초 시내가 연결되고, 실향민 2세대를 넘어 3세대까지 이어져 온 시간만큼이나 청호동과 아바이마을도 변해왔다. 실향민 1세대와 함께 보낸 시간이 적은 3세대에게는 실 향의 아픔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북 이야기를 들려줄 1세대 어른 들도 몇 남지 않게 되었다. 이북 땅을 그리던 그들의 대다수는 이미 돌아가셨다.
김성하 회장의 가족들도 이북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통일되면 이북에 가서 땅을 찾 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웠지만, 이제는 현실감 없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 았다. 김성하 회장은 사라지는 이야기들이 안타까웠다. 청호동 주민들만의 끈끈한 유대감 도 지키고 싶었다. 그것이 실향민 2세대로서의 본분이자 책임이라 생각했고, 청호동 선후 배들과 함께 '아사모'를 만들었다.
아사모(아바이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청호동 주민들을 중심으로 2005년 결성 된 단체로, 대부분 청호초 출신이며 구성원의 80~90%는 실향민 2세대이다. 청호동의 마 을잔치와 경로잔치를 열기도 하고, 환경정화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아바이마을을 아끼고 사랑하는 아사모 덕분에 흐릿해진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돈독한 관계가 다시 선명해졌다.
속초사자놀이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 속초사자놀이보존회
속초사자놀이보존회는 도문농요와 함께 속초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인 ‘속초사자놀이’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김성하 회장은 많지 않은 속초의 문화재 중 대표성을 띤 ‘실 향민 문화’가 퇴색되는 것이 안타까워 속초사자놀이보존회를 시작했다. 1세대 어르신들이 많았던 과거에는 속초를 ‘실향민의 도시’라 이야기할 만했지만, 이제는 1세대 당사자들도, 실향민 문화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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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부터 ‘속초사자놀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에는 사자놀 이에 대해 어렴풋하게만 인지하고 있었다. 공설운동장을 지나가며 얼핏 보았던 탈춤 정도 로 말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10년 정도 하다가 홀로 계신 어머니가 안타까워 아내와 함께 내려온 속초에서, 어릴 적 보았던 속초사자놀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 다. 어린 시절에는 늘 보아온 실향민 문화였는데, 이제는 관심을 기울이고 여기저기 둘러보 아야만 겨우 찾을 수 있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일까, 그는 속초 사자놀이만은 꼭 지켜내고 싶었다.
속초사자놀이는 강원도의 무형문화재이면서 2022년 11월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 산에 등재되었다. 안동을 주축으로 18개의 전국 탈 문화단체들이 ‘한국의 탈춤’으로 동시 등재를 신청했고, 그렇게 국가지정문화재 5개와 지방무형문화재 13개가 동시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속초사자놀이는 원래 북청사자놀이에서 기원했다. 이북에서부터 내려온 ‘북청사자놀이’가 속초의 실향민들에 의해 계속해서 변형되고 재구성되면서 속초사람들만의 사자놀이 춤이 정착되었다. 이후 서울에 근거지가 있는 북청사자놀이를 속초 사람이 배우고 활동하기에 제약이 많다는 의견으로, ‘속초사자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북청사자놀이는 공연에 맞추어 정형화되어 있는 반면 속초사자놀이는 실향민들이 각각 정 월대보름을 기점으로 지신밟기를 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이러한 차이로 속초사자놀이와 서울의 북청사자놀이는 명백한 차별성을 갖는다. 단, 정월대보름이 아닌 공식 공연을 올릴 때는 북청사자놀이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진행된다.
실향민 2세대로서, 그리고 속초사자놀이보존회 회장으로서 그는 여전히 할일이 많다. 현 재 보존회 회원은 약 50명. 공연할 때 들어가는 인원만 40명 정도이니, 더 많은 인원이 필 요하다. 어렵게 지켜가고 있는 속초사자놀이인 만큼,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여러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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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노력 중이다. 더 많은 전승 활동을 펼치기 위해 수업을 열고, 교육사업도 병행한다.
사자놀이의 등장인물은 캐릭터로 만들어져 여러 교육사업에 함께 쓰이고 있다. 이 캐릭터 들은 몇년 전 관광두레 지원사업을 통해 만들었다. 귀여운 속초사자와 도깨비들이 어우러 진 캐릭터들은 속초 어린이들과 속초를 방문한 타 지역 어린이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지 역의 문화재를 알리고 지키기 위해 시작한 교육사업 ‘생생문화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속 초사자놀이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생생문화재의 우수단체로 선정되기도 한 속초 사자놀이 프로그램을 통해, 이제는 속초 어린이라면 한 번쯤 속초사자를 만나고 쓰다듬어 본 경험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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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사자놀이보존회는 현재 아바이마을 간이해변에 위치한 ‘강원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31호 속초사자놀이 전수관(청호동 550-13)’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공간은 규모가 작아 사자놀이를 연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사무실로 사용될 전수관 외에, 더욱 활발한 전승 활동을 위한 '공식 전수관'을 짓고 끊임없이 전승 활동을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전승 활동에는 사자놀이를 선택한 후배들의 미래를 준비해주는 것도 포함 된다. 지금은 사자놀이를 하는 후배들이 생계를 위한 별도의 일을 병행하고 있는 상황. 사 자놀이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는 것이 스스로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사자놀이를 지킨다는 자부심 하나로도 생활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가는 것, 그 것이 속초사자놀이보존회가 해야 할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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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속초에서 발견한 것들
서울에서 10년을 생활하다 속초로 돌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속초사람들은 나태하고 게을러 보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은 ‘여유로움’이었다. 늘상 쫓겨 사는 것이 당연하던 서울 생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여유로움, 느린 차를 기다려줄 수 있는 너그러움말이다. 이걸 깨 달았을 때, 그의 속초살이 또한 한껏 더 여유롭고 너그러워졌다.
속초로 다시 돌아와 지켜가고 있는 것들도 많지만, 지키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들도 많 다. 그의 부모가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인 것처럼, 김성하 회장도 집을 잃은 실향민이라 고 이야기한다. 청호동의 다리와 다리 사이에 있던 집,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가득 차 있는 그 집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가 군대에 가 있을 때 신수로가 개설되면서 그의 집은 역 사 속으로 사라졌다.
옥상에 올라서면 청초호와 울산바위가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바닷가가 보이던 집. 어촌의 정취가 가득 묻어있던 그 집이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소중함을 몰랐으니, 사진을 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소문해서 사진을 구해보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여전히 생 생하고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은 그 집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신수로를 지날 때 마다 그는 여전히 '여기에 있던 내 집'을 기억한다. 어른들이 수십 년 지난 고향 이야기를 어 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 이제서야 와닿고 있다고.
속초다움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
그는 속초를 속초답게 만드는 것이 ‘속초가 오래도록 품고 있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기성 세대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핫하고 힙한 것을 쫓아가는 시대가 놀랍기도 안타깝기도 하다. 속초가 속초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금의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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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사자놀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속초사자놀이는 속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죠.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몇 없는 이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게 가장 속초다 운 것이니까요. 그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시민 여러분도 속초사자 놀이가 속초문화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생각으로, 이 자존심이 꺾이지 않게끔 잘 지켜봐 주시고 동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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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속초다운 것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애써온 김성하 회장. 새것이든 옛것이든, 지키기 위한 발버둥 없이 지켜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속초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움직이는 김성하 회장과 속초사자놀이보존회의 행보를 속초시민으로서 응원한다.
김안나
환경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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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만나면 목신은 마냥 즐겁다
김안나씨는 친구들 사이에 목신(牧神)이라 불린다. ‘목신’은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속초아끼기’ 다음카페에서 그가 쓰는 닉네임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닉네임을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 따왔다. ‘목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Pan)이다. 숲과 사냥, 목축을 맡아보는 신으로,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목신, 48살 늦깎이에 환경운동을 시작하다
목신 김안나씨는 속초아끼기 카페 회원으로 집수리와 도배 봉사활동도 하고, 개인적으로 까리따스 수도원 도시락 배달 봉사활동도 해 왔다. 2008년 2월 목신은 평소 알던 오라버니로부터 속초고성양양환경운동연합 상근자에 지원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목신은 평소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으니, 환경운동 활동가로 적 임자라는 것이다. 목신은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과 딸 두 자녀를 혼자서 키웠다. 17 년 동안 보험회사 영업을 하다가 그만두고, 택배회사에서 1년 반을 일했다. 그때 아들은 대 학 3학년, 딸은 고3이었다. 당시 환경운동연합 상근 간사 급여는 70여만 원에 식대 10만 원으로 예전 직장 수입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예전 직장 때 수입으로도 힘들어 애 들 학원비를 몇 달씩 밀리기도 했기에, 이 급여를 받고 일하는 건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목신은 고심 끝에 이 미친 짓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세상일에 눈을 뜨기 시작한 20대부터 지역에서 뭔가 의미 있는 사회활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 후 혼자서 애들을 키우느 라 정신이 없어 먹고 사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제 더 나이가 들면 예전 부터 하고 싶은 일은 끝내 못할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엄마가 더 늦게 전 에 이 일을 꼭 하고 싶은데, 이 일을 하게 되면 너희들 제대로 보태줄 수 없는데, 괜찮겠느 냐?”고 물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우리는 괜찮으니,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거들어줬다. 2008년 3월 2일 마흔여덟 늦깎이 나이에 목신 김안나는 환경단체 간사로 어 렵게 첫 출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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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시민들과 철새도래지 옆 고층 건물을 막다
지역 환경단체 상근자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처음 일을 시작한 지 1년 이상은 거의 주 말도 쉬지 못하고, 평일에도 밤 11시가 되어서 퇴근했다.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같이 일하 던 사무국장이 몸이 아파 그만두고는 혼자서 상근자로 근무했다. 1년 반 후 사무국장 일을 떠맡게 되면서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14년 상근활동 기간 중 절반은 혼자서 근무했다.
속초시는 산과 바다, 호수까지 품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도시이다. 그러나 1990년대부 터 시작된 관광개발로 자연환경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뜻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역 환경을 지키자고 나섰다. 속초 최초의 시민환경단체인 속초고성양양환경 운동연합은 1996년 청초호 매립반대 시민운동을 계기로 창립했다. 환경운동연합 회원들 은 환경캠페인과 환경교육, 생태조사와 동아리 활동까지 정말 열심히 자원활동을 벌였다. 환경운동연합 상근활동가도 일도 많았다. 상근활동가는 회원 활동을 지원하고, 수시로 터 져 나오는 지역 환경이슈에 대응해 집회나 시위도 챙겨야 했다. 다른 단체와 함께 시와 시 의회의 활동을 감시 견제하는 의정지기단 활동도 펼쳤다. 전국적인 환경이슈가 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저지활동도 벌이고, 지역의 소중한 자연호수인 청초호와 영랑호 지키기에 도 적극 나섰다. 속초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계획조례 개정 시민발의도 앞장섰다. 해 마다 11월이면 청초호 철새도래지에서 철새맞이 행사를 개최했다. 그는 환경활동가로 가장 보람된 일로 청초호 41층 반대활동을 손꼽았다. 지난 2016년 속 초시가 청초호 철새도래지 옆에 12층 층수제한지역을 41층이 가능토록 도시관리계획을 변경했다. 이에 속초시민들은 41층 특혜변경으로 청초호 경관을 가로막고, 철새도래지 도 심각한 훼손이 불가피하다며 반대운동을 펼쳤다. 시민들은 1년 이상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시의 부당한 인허가를 막기 위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행정소송 1심과 2 심에서 주민들이 승소하고, 강원도 도시계획심의에서도 41층 건축물 인허가가 부결되었 다. 속초의 자연을 사랑하는 시민들과 환경단체 회원들이 부당한 시 행정에 맞서 작은 성 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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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시민에겐 너무나 소중한 영랑호
그는 영랑호 근처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놀러 다니던 영랑호는 정이 많이 붙은 곳 이다. 청초호는 호수의 1/3이 매립되어 부두와 유원지시설이 들어선 반면, 영랑호는 비교 적 호수 원형은 잘 유지되어 왔다. 한 때 유원지와 양어장 운영으로 수질이 크게 악화되었 지만, 많은 노력으로 수질도 많이 개선되었다. 영랑호는 속초시민의 쉼터로 많은 시민들 이 사랑하는 곳이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봤던 영랑호는 물이 아주 맑았어요.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인 가 거기에 양어장을 했잖아요. 그리고 호숫가로 콘도들이 지어지고, 골프장도 생겼지요. 내 가 환경연합에 들어오기 전 일이죠. 그 맑던 영랑호가 썩은 하수구처럼 변했어요. 하구에서 는 악취도 심하고. 결국 바닥을 준설해 오염물질도 걷어내고, 바닷물이 드나들 게 도류제를 설치했지요. 물고기들이 한꺼번에 하얗게 죽어서 물에 떠오르기도 했어요.”
환경운동연합은 영랑호 수질 개선뿐만 아니라 주변 백로, 왜가리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 애 를 많이 썼다. 도류제* 설치로 영랑호에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민물고기들이 갈 곳이 없어 영랑호 상류 장천천에 어류피난처를 조성했다. 그런데 속초시가 지난 2008년 이곳 백로 왜 가리 서식지 근처에 반려견놀이터를 만들었다. 결국 환경운동연합의 지적으로 반려견 놀이 터는 어류피난처 생태습지공원 밖으로 이전했다. 2019년 4월 발생한 산불로 영랑호 백로, 왜가리 서식지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11월 속 초시는 불탄 나무들을 모두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때 환경운동연합은 “불탄 서식지 에 38그루의 나무에 212개의 둥지가 관찰되었다”며, “집이 철거되어 거리로 내몰리는 사 람과 같이 남아있는 백로와 왜가리를 위해 벌목을 중단해야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환경운 동연합이 산주인을 설득해 2백여 그루의 나무를 벌목하지 않게 되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도류제(導流堤): 하천이나 해안에서 연안의 침식이나 퇴적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천수 또는 해수의 흐름방향을 유도하는 시설로 제방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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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왜가리들은 죽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서식하고 있다. 원주지방환경청도 영랑호를 살리려는 지역 환경단체와 시민들의 노력을 높게 평가했다. 영랑호 지키기에 앞장섰던 그는 지금의 영랑호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영랑호를 아끼는 많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직 속초시장 때 속초시가 관광객들에게 볼거 리를 제공한다고 자연호수 영랑호를 두 동강 내는 부교를 건설했다. 부교 때문에 영랑호를 찾아오는 철새떼들은 맘 놓고 호수를 노닐지 못한다. 겨울에는 부교를 경계로 호수 한쪽만 꽁꽁 어는 기이한 현상까지 벌어졌다.
숨비소리 같은 검둥오리 울음소리
2022년 2월 말 목신은 꼬박 14년을 일한 환경운동연합 상근직을 그만뒀다. 지금은 납북 귀환어부 인권침해사건 피해자를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상근활동을 그만두고 나서 자원 순환 모니터링과 설악산케이블카 반대 활동을 자원해서 진행했다. 요즘 목신은 시간만 나면 새들을 만나러 다닌다. 새들을 만나면 마냥 즐겁고, 스스로 치유 가 되는 걸 느낀다. 주로 양양 남대천과 고성 천진해변, 문암해변, 남천, 북천, 용촌천을 찾 아간다. 청초호와 영랑호도 가끔 들른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면 고성 화진포와 송지호를 자 주 찾아간다. 겨울이 오면 올해는 또 어떤 철새들을 만나게 될까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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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l 김안나
“겨울에는 화진포 앞바다에서 해녀의 숨비소리 같은 울음을 들려주는 애들이 있어요. 검둥 오리. 걔네가 후~~~ 하고 울어요. 너무 이뻐요. 겨울만 되면 애들이 올해도 찾아왔을까 기 대하면서 화진포를 찾아가게 되요. 청간해변에서 볼 수 있는 흰줄박이오리도 이뻐요. 고니 들은 양양 남대천이나 고성 남천, 용촌천에서 자주 봐요.”
목신은 새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안타까운 장면도 많이 목격한다. 귀여운 도요물떼새들이 종종 걸음으로 노니는 해변에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새들을 모두 쫓아버린다. 사 람들의 간섭으로 새들이 머물 곳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속초 인근의 해변은 모두 사람들에 게 점령당했다. 어느 해변을 가도 서핑을 하거나 스킨스쿠버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자 연이 그냥 자연 그대로 있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는 걸 절감한다.
미시령 꼭대기와 영랑동 해변길의 추억
20여년 전, 목신은 환경운동연합 상근활동을 하기 전에 인터넷 음악방송 DJ를 하기도 했 다. 그때 목신은 속초에는 설악산과 동해, 호수 영랑호와 청초호가 있다고 자랑했다. 미시 령 꼭대기에서 보면 청초호와 영랑호는 속초의 눈동자처럼 보인다며, 속초에 오면 꼭 영랑 호와 청초호를 가보라고 자랑했다. 목신은 미시령 꼭대기에 자주 올라갔다. 이것 저것 속 시끄러운 일이 있을 때는 미시령 꼭 대기에 올라가서 온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으면 머리가 다 맑아졌다. 음악방송을 통해서 목 신은 미시령 꼭대기에 가서 바람을 맞아 보라고 추천했다. 목신은 영랑동 해변길도 자주 걸었다. 등대 북쪽 영랑동 해변길에서 영금정 바위쪽으로 걸 어오다가 바위에 주저앉아서 파도 소리도 듣곤 했다. 등대 오르는 길 옆에 작은 가게에서 할머니가 500원을 받고 믹스커피를 타줬다.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을 들고 가게 앞마당에 서 노는 개랑 같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 이런저런 시름이 다 사라졌다. 20년이 지난 지금 미시령 꼭대기도, 영랑동 해변길도 옛 모습이 아니다. 속초 해안도 나 즈막한 집들이 들어선 풍경은 사라지고, 숨막히는 고층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지키는 사람들 122
위안과 위로를 주는 속초를 소망한다
“저는 요즘 속초에서 미래를 꿈꾸기가 힘들어요. 정신없이 바뀐 속초를 보면 마음이 참 불 편해요. 예전에는 집에서 중앙시장까지 걸어 다니고, 영랑호도 사부작사부작 걸어 다녔지 요. 지금은 속초가 너무 바뀌어 예전 같은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없어요.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게, 속초의 좋은 생태 환경을 현명하게 잘 지켰으면 좋겠어요.”
목신은 위로와 위안을 주는 속초를 꿈꾼다.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이 와서 위로받을 수 있 는 속초. ‘괜찮아. 맘을 내려놓고 그냥 쉬어도 괜찮아’라고 위안의 울림을 주는 속초. 목신 은 이런 바람을 담아 속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 2곡을 추천했다. 한 곡은 아일랜드 출신 필 콜터가 작곡한 ‘The Star of The Sea, 바다의 별’이다. 바다 에 나가 죽은 형을 추모하는 곡이라는데, 내용과는 상관없이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곡 이다. 목신은 그냥 혼자 바닷가에 주저앉아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이 음악을 듣곤 한다. 옛 친구들 생각도 하고, 떠나간 사람들 생각도 하고, 아니면 뭐 아무 생각 없이 들어도 그 냥 좋은 노래다. 또 한 곡은 가수 밍기뉴가 부르는 ‘나의 모든 이들에게’이다. 목신은 조금은 유치한 듯한 이 노래 가사가 좋다. 우리는 잘 지내다가도 한 번 당겨놓은 고무줄을 탁 놓은 것처럼 순간 허 전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노래가 위로가 된다. 목신 김안나는 이 노래처럼 속초가 지치고 힘들 때면 찾아와 위로와 위안을 받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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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해도 돼, 다 괜찮아질 거야 슬퍼해도 돼, 다 지나갈 거니까 말해줘도 돼, 너의 비밀 같은 것 내가 다시는 안 아프게 해줄게 너가 아픈 것 다 이해할 거야 너가 슬프면 내가 달려갈게 …
김진호
속초 갯배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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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갯배는 함께 끌고 가는 배입니다
갯배를 끄는 일은 1백여 년 갯배 역사를 잇는 일이며, 실향민의 귀향 염원을 잇는 일이다. 오늘도 김진호 갯배 선장은 벅찬 갯배를 끌고 속초항 물길을 건넌다.
김진호 갯배 선장의 하루
갯배는 속초시내와 아바이마을 청호동 사이 물길을 건너는 속초항 도선(渡船)이다. 바닥이 평평한 배에 올라타고 사람이 직접 갈고리로 쇠줄을 끌어 당겨 반대편 선착장까지 물길을 건너간다. 이 갯배는 관광지 속초에서 가장 유서 깊은 명물로 손꼽힌다. 갯배는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바닷가 무동력 도선이라고 한다. 갯배를 끄는 일은 특별한 일이다. ‘갯배 선장’은 유일하게 속초에만 존재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갯배는 속초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이죠. 택시보다 편리하고, 버스보다 빠르다고 해요. 이 갯배를 타면 아바이마을에서 속초시내로 빠르고 편하게 넘어갈 수 있어요. 갯배는 속초의 유명 관광상품이 되었어요.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김진호씨는 지난 2015년 6월 10일부터 시작해 8년 6개월 동안 갯배를 끌어온 베테랑 갯 배 선장이다. 하루 8~9시간씩 갯배를 끌고 50여 미터 물길을 숱하게 건너가고 또 건너왔 다. 지난 8년 동안 그가 끌고 다닌 갯배 운행거리는 못 잡아도 1만km가 넘는다. 이 거리라 면 우리나라에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이르고도 남을 거리이다. 갯배는 5월부터 10월까지 하절기에는 오전 5시부터 밤 11시까지 18시간 동안 운행한 다.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동절기에는 오전 5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17시간 운행 한다. 모두 4명의 선장이 2개조로 나누어 갯배를 교대로 끌고 있다. 1주일 단위로 조별 근 무시간을 바꾸어 가며 교대로 근무한다. 예전에는 쉬는 날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1주일 에 하루씩 쉰다. 새벽 근무를 하는 날이면, 김진호 선장의 하루는 새벽 4시 반에 시작된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5시가 채 안되어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다. 갯배 선착장에 도착 해 묶어놓은 갯배를 풀고 5시 반부터 운행을 시작한다. 하절기에는 30분을 앞당겨 5시부 터 갯배를 운행한다. 오전 9시 반까지 꼬박 4시간 동안 갯배를 끌며 근무한다.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아침 요기를 한다. 오전 일이 끝나면 집으로 들어가 잠시 쉰다. 다시 오후 1시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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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부터 5시30분까지 4시간 동안 근무한다. 야간조가 되면, 아침 9시에 집에서 나온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시 반까지 4시간 동 안 일한다. 집에 들어가 쉬다가 다시 오후 5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5시간을 근무한다. 하절기에는 밤 11시까지 30분을 더 근무한다. 갯배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운행된다. 갯배 선장들의 수고로운 노동이 있기에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도 누구든지 갯배를 타고 안전하게 물길을 건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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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배보다 더 무거운 인생살이
“나이가 70이 다 되었으니 어디 써주는데도 없었죠. 나이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 다고 해서 갯배 끄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일은 고되지만, 그래도 이 일 덕분에 먹고 살아 요. 살아온 길을 가만해 생각해보면, 구비구비 다 고생길이었지요.”
올해 나이 78세의 김진호 선장은 갯배 선장 4명 중 최고 연장자이다. 김진호 선장은 자신 이 끄는 갯배보다 더 무거운 인생을 살아왔다. 지금도 갯배를 끄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30 년째 아픈 부인을 뒷바라지하며 살고 있다. 김진호 선장은 강릉 옥계가 고향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아픈 바람에 중학교 를 가지 못했다. 17살 나이에 아버지가 작고해, 7남매 맏이인 그가 동생들을 다 키우다시 피 했다. 리어카도 끌고, 바로 아래 동생이랑 같이 공사일도 다녔다. 붕어빵을 파는 하꼬방 (판잣집)을 인수받아 2~3년간 운영하다가 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했다. 1968년 8월에 군 에 입대해서 3개월 만에 월남전 파견을 지원했다. 월남에서 소총부대에 배치되어 6개월 간 첨병을 서기도 했다. 군 복무를 마친 김진호 선장은 고향 옥계에서 옷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옥계는 시골이라 장날에만 장사를 할 수 있어 빚만 늘었다. 중매로 속초에 살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1975 년 10월 속초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속초 중앙시장 구 어시장 근처 도로변에서 노점상으로 옷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양말과 메리야스(속옷)만 팔다가 자리가 잡히면서 유아복과 아동복도 취급했다. 그때 는 집집마다 애들이 많아 저렴한 아동옷이 많이 팔렸다. 불법 노점상을 한다고 수차례 파출 소에 붙들려 가기도 했다. 그래도 처갓집 안면으로 손님이 점차 늘었다. 도로변은 단속이 하도 심해 중앙시장 안쪽 신흥식당 옆에 자릿세를 주고 노점을 옮겼다. 이 때부터는 양양장에 가서 옷을 팔기도 했다. 옷장사가 제법 잘 되면서 살림도 나아져 셋방 살이를 청산하고 집도 한 채 장만했다. 노점생활도 정리하고 중앙시장 안에 세를 얻어 작 은 옷가게를 하나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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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옷장사를 정리하고 청학동 영일여관 인근에 가게를 얻어 식당을 차렸다. 장사가 그 럭저럭 잘 되었는데, 그만 아내가 병이 나고 말았다. 한번 발병하면 며칠씩 식당 문을 닫아 야 했다. 손님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은행 빚과 사채만 늘어났다. 한 달 병원비만 수십만 원 씩 들어갔다. 결국 파산신청을 해 빚을 정리하고는 2014년 4월 청호동으로 이사를 왔 다. 저렴하게 집을 얻었는데, 집주인이 마음이 좋아 10년이 다 되어도 세를 올리지 않고 있 다. 청호동으로 이사 온 지 1년만인 2015년 6월 10일, 김선장은 갯배 끄는 일을 시작했다.
안전사고 발생할까 노심초사
“배는 천천히 가도 관계없는데 안전이 제일 문제예요. 바람도 안 불고 날씨가 좋을 때도 순 식간에 너울성 파도가 들이 닥칠 때도 있어요. 너울성 파도가 밀려오면 물이 올라갔다 내 려갔다 하고, 배가 제멋대로 흔들려요. 이럴 때는 갯배에서 내리다가 넘어질 수도 있어요.”
갯배 선장들은 안전에 가장 신경을 쓴다. 혹시라도 안전사고로 승객이 다치는 일이 발생할 까 노심초사 항상 걱정이다. 너울성 파도가 예고 없이 들이쳐, 갯배에서 손님이 내리다가 넘어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특히 마을에 사시는 분들은 노인이 많이 타기에 안전 때문에 항 상 신경을 바짝 쓰고 있다. 청호동에 사는 어느 노인은 한두 번 갯배에서 내리다가 넘어진 후로는 겁이 나서인지 갯배를 타러 오지 않는다. 물길의 수위는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철에는 수위가 높아져 갯배가 선착장보다 더 높 게 닿는다. 안전하게 발을 내딛도록 선착장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린다. 반대로 날이 추울 때는 수위가 내려간다. 그래서 갯배가 선착장보다 더 낮게 닿는다. 이럴 때가 더 위험하다. 갯배와 선착장 사이에 턱이 생긴다. 젊은 사람들은 잘 내리지만, 나이 많은 노인들은 자칫 걸려 무릎을 다치고 얼굴을 찧을 수도 있다. 갯배 선장들은 안전 문제로 승객과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선장들의 안전조치를 무시하는 승객들이 종종 있다. 안전사고가 날까봐 아이들 혼자 갯배를 끄는 건 금지하고 있다. 선장 은 아이 혼자 갯배를 끌면 부모랑 같이 끌라고 말한다. 그런데 부모와 애가 같이 갯배를 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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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도, 기념사진 찍어준다고 애만 혼자 갯배를 끌게 하는 경우도 많다. 선장이 그런 걸 지 적하고 제지하면, 기분 나쁘게 했다고 시청에 민원을 넣기도 한다.
갯배는 함께 끌고 가는 배입니다
갯배는 1년 내내 쉬는 날 없이 계속 운항된다. 다만 태풍이 오거나 너울성 파도가 심한 날, 태풍급 바람이 부는 날은 갯배 운항이 중단된다. 너울성 파도가 심하면 선착장에 배를 갖다 대지 못한다. 기상 악화로 갯배 운항이 중단되는 날은 1년 중에 5~6일 정도 된다. 갯배는 힘들여 끌지 않아도 잘 가는 배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갯배를 잘 모르는 사람은 ‘슬 슬 놀면서 당겨도 배가 잘 미끄려져 가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갯배를 직접 끌 어본 사람 중에는 “이거 하루 종일 끌면 힘들어서 어떻게 일하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김진 호 선장은 바람이 불 때 갯배를 끄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바람 불 때는 갯배를 끌기가 정말 힘들어요. 아주 바람이 세게 불면 배가 운항을 못하는데, 어지간히 바람이 불면 갯배를 운항해야 하거든요. 바람이 불 때는 선장이 혼자 힘으로는 갯 배를 끌고 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손님들한테 갯배를 같이 끌고 가자고 요청해요. 동네 분들은 끌어주는 분이 많아요. 시민들이나 관광객들도 같이 끌어주는 사람들도 제법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가 돈을 내고 타는데, 왜 배를 끌라고 강요하느냐’라며, 기 분 나쁘다고 민원을 넣기도 해요.”
보통은 갯배 선장 2명이 한 조로 같이 근무하면서 갯배를 끈다. 승객이 적은 주중에는 한 척 을 운항하고, 승객이 많은 주말에는 두 척을 동시에 운항한다. 선장 2명 중 한 사람이 빠져 혼자서 근무할 때는 갯배 끌기가 많이 힘들다. 특히 혼자 근무할 때 건너갈 손님은 한 명도 없는데,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갯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 갯배를 같 이 끌고 갈 수 있는 승객이 있으면 힘이 덜 드는데, 선장 혼자서 배를 끌고 건너편으로 넘어 가자니 힘이 아주 많이 든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어 갯배가 밀리면, 갯배 끌기는 더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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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다. 갯배는 몇 사람이 끌면 좋을까? 김진호 선장은 세 사람이 끌면 좋다고 한다. 50여 미터를 혼자서 갯배를 끌고 가기에는 너무 힘들다, 두 사람이 끌면 조금 힘이 덜 든다. 세 사람이 끌어야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건너갈 수 있다. 갯배를 자주 타는 동네 사람들은 갯배는 혼자 끌고 넘어가는 배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 께 끌고 가는 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선장이 혼자서 배를 끌면, 웬만 하면 갈고리를 들고 나서서 같이 배를 끈다. 지난 2017년부터 갯배 요금이 편도 2백 원에서 5백 원으로 인상되었다. 이때부터 속초시 민들은 무료로 갯배를 탈 수 있다. 김진호 선장은 “속초 시민은 무료로 갯배를 타는 만큼, 내가 갯배 주인이라 생각하고 같이 배를 끌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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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갯배는 1백년 이상 같은 자리를 지키며 변함없이 운항되고 있다. 옛 사람들은 이곳 갯 배나루를 속초의 옛 이름인 속새라는 말을 붙여 ‘속새개목’이라고 불렀다. 1910년대 발행 지도에는 지금의 갯배 운항구간에 도선 운항을 의미하는 지도부호가 표시되어 있다. 그 때 이곳은 원산에서 양양까지 이어지는 2등도로 구간이었다. 그래서 자동차와 우마차도 도선 (갯배)을 이용해 물길을 건넜다. 양양에서 원산으로, 원산에서 양양으로 가려면 꼭 이곳에 서 배를 타고 물길을 건너야만 했다. 갯배는 속초가 일제강점에서 해방되어 북한 통치하에 있을 때도 같은 자리를 지켰다. 한국 전쟁 때 사람들은 갯배를 타고 피난을 가기도 했다. 당시 운행하던 갯배는 전쟁 중에 불타 버렸다. 1955년 4월부터 다시 운항된 갯배는 68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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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마을과 시내를 연결하는 갯배는 교통수단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 갯배는 청호동 실향민들을 세상과 이어주는 소통과 교류의 수단이었다. 갯배는 분단과 단절을 뛰어넘으려는 실향민의 귀향 염원을 이어주는 매개물이었다. 갯배를 끄는 일은 1백여 년 갯배 역사를 잇는 일이며, 실향민의 귀향 염원을 잇는 일이다. 오늘도 김진호 갯배 선장은 벅찬 갯배를 끌고 속초항 물길을 건넌다.
심삼옥
아사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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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들려주는 여인, 심삼옥
과거 오징어와 명태를 씻어 말리던 덕장을 다듬은 위드피스 공간에서 아사모* 심삼옥 사무국장을 만났다. 덕장답게 마당에는 따뜻한 볕이 들었고, 오렌지 색 고양이 한 마리가 햇빛 아래 앉아 있다 귀찮은 인기척에 자리를 피했다. 억지로 양보 받은 그 자리에서 싸매놓은 청호동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아사모 : 아바이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
실향민이 일군 마을
청호동과 아바이 마을은 실향민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다. 피난민들은 갑작스러 운 전쟁 소식에 잠깐만 머물다 갈 생각으로 크고 작은 짐 보따리들을 챙겨왔다. 그들에게 낯선 속초는 조만간 떠나버릴 경유지에 불과했다. 적은 살림으로도 애써 하루하루를 버텼 고, 매서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서 판자를 주워 모았다. 바리바리 싸 온 보따리 는 도로 가져가지 못하고 이곳 땅에 모종으로 틔워내야 하는 씨앗이 되어버렸다. 결국, 엄 마 손잡고 내려온 어린아이들에게 이곳은 어린 시절 기억이 됐다. 아마이, 아바이들은 청호 동에 살아남았고, 여기서 어린 것들을 키워 냈다. 실향민 2세대인 심삼옥 국장은 실향민 1세대와 1.5세대를 구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 유는 기억의 차이 때문이다. 피난 올 당시의 기억을 명확하게 하는 세대는 1세대, 너무나 어려 부모 따라온 피난의 기억이 없는 이들이 1.5세대이다. 세월이 흘러 1세대 어르신들은 많이 돌아가셔서 이제 청호동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부 모 세대가 말하는 ‘그리운 고향’은 그 의미가 점점 퇴색해갔다. 1.5세대 실향민들은 고향 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 기억 속에 고향은 속초 청호동이었다. 어쩌면 ‘청호 동 1세대’가 그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청호동 1세대’는 마을이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 했다.
사진제공 l 심삼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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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실향민의 이야기에 가치를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어느 날 내가 마음을 딱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우리 아마이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분 들 이야기가, 삶이 그냥 묻혀 버리는 거야.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 는데 그런 거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어서….”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 고생한 사연은 남의 자식에게 편히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친자식 아 닌 게 이야기를 수집할 수 있는 큰 장점이라며 웃었다. 현재는 청호동에 살고 계신 1세대 어르신들은 10명도 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기억마저 희미해져 간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이 들의 이야기가 잘 기록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어르신들과 막걸리 한잔하면서 ‘고향 돌아가서 살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대부분 어르신의 답변은 ‘여기서 살아야지.’였다. 고생하고 이루어 놓은 것이 모두 이 곳 청호동에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오징어와 명태의 시대
실향민 2세 심삼옥 국장이 기억하는 청호동 이야기도 궁금했다. 속초의 수산업 황금기였던 시기였고, 분위기는 이전 세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시절에는 명태가 넘치게 잡혔 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어선과 항구는 늘 풍요로웠다. 그녀는 배 타고 나간 아바이들을 기다린건지 명태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며 웃음 지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명태가 무슨 의 미가 있나 싶었는데 강냉이 때문이었다. 도시 아이들이 빈 병을 주웠다면 청호동 어린이들 은 못난 파지 명태를 얻어서 강냉이 파는 아저씨에게 가져가 바꿔 먹었다고 한다. 그 내용 이 얼마나 신선하고 재밌는지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는 명태 말고는 취급도 안했어. 양미 리며, 물텀벙이* 같은 게 잡히면 저쪽에 휙 집어 던져 놨지.” 그녀는 그 시절 엄마들이 고기를 씻던 수돗가라며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 “지금은 다 치웠 지만 여기서 아마이들이 물고기 손질하고 씻고 말리고 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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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텀벙이 : 정식 명칭은 ‘미거지’로 동해안에서는 곰치, 물메기, 물곰 등으로 불리는 생선이다. 속초 먹거리인 물곰탕의 주재료이다.
명태뿐만 아니라 청호동은 오징어 덕분에 하루하루가 바빴다고 한다. 뱃일하는 남자들이 오징어를 잔뜩 잡아 오면 여자들의 손은 바빠졌다. 오징어할복장에 모여서는 얼마나 많은 오징어 배를 땄는지 모른다. 오징어 더미를 수레에 담아 옮기는 짐꾼들도 쉼 없이 동네를 쏘다녔다. 씻어 낸 오징어 귀를 잡아당겨 꼬챙이로 꽂아 곱게 모양을 잡아냈다. 물기를 뚝 뚝 흘리면서 오징어들은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 청호동 덕장에서는 비릿한 오징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적당하게 잘 마른 오징어들은 줄 맞춰서 바스락거리는 비닐에 싸여서 비로소 여기저기로 팔려나간다. “오징어 하나에 몇 명이 빌붙어 살았는지 몰라. 참 고맙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오징어 황금기는 거짓말처럼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기후 변화로 인 해 오늘날 동해안의 오징어 어획량은 현저히 줄었고 속초는 ‘오징어 산지’라는 칭호를 잃었 다. 청호동의 오징어할복장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수년간 문을 닫고 방치되었다. ‘오징 어 일자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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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작로(新作路)
그녀의 또 다른 추억은 바로 ‘신작로’라고 했다. 과거 비행기 활주로로 쓰였던 지금의 청호 로는 아바이 마을까지 이어진 청호동의 중심가였다. 사람들은 이 길을 신작로라고 불렀고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점점 성장했다. 어린이들이 이 길을 통해 등하교하면 가게 하시 는 아주머니, 아주버니들이 ‘누구네 집 아들이네, 딸이네.’ 하며 이름을 몰라도 반갑게 아 는 척 해주셨다고 했다. 초등학생 어린이들은 신작로 위, 갓 설립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4시간 공부하고 4시간 학 교에 노동력을 보태었다고 한다. 어린 학생들은 자기네들처럼 어린 소나무를 심었다. 여자 애들은 세숫대야에 흙을 받아 머리에 이고, 남자 아이들은 돌을 골라 리어카에 담아 옮겼다. “저기 보이는 소나무가 아마 나 어릴 때 심은 나무일 거야.” 그녀는 키가 제법 큰 소나무 를 가리켰다. 현재는 금강대교와 설악대교가 건설되고 청초호에 물길을 내면서 아바이 마을과 청호동이 둘로 나뉘었다. 청호동과 아바이 마을 사이의 신작로는 물로 가득 채워졌다. 게다가 바닷가 쪽에는 경치 좋은 해안도로가 생기면서 ‘구작로’가 되었지만, 여전히 청호동 사람들의 수많 은 왁자지껄한 사연을 담고 있는 귀한 길이다. 청호동 인구는 1960년대에는 7천 명이 넘을 정도로 속초시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고 한 다. 잠시 머물기 위해 깔았던 자리가 속초의 정체성을 깊게 나타내는 곳이 될지 아무도 예 상 못했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수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먹을 것이 생겨날 거라고 보 따리 짐을 싸서 오던 실향민들은 생각이나 해봤을까?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그저 사람들이 채워져서 만들어진 청호동은 우리가 모르는 사연을 참 많이도 품고 있다.
딩동댕- 동-. “잠시 안내방송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너울성 파도가 심하므로….” 오늘 아침에 들었던 개 미 소리 만치 조그만 아파트 안내방송과는 상반되게 청호동 마을 안내방송이 ‘신작로’에 쩌 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139 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문화와 예술이 있는 청호동
그는 청호동 사람 아니랄까 봐 늘 바쁘다. 마을해설가 일이며, 아트플랫폼 갯배 관리며 할 일이 태산이다. 청호동 이야기를 수집하면서 특히 힘든 점을 물었다. “두 명만 더 있으면 참 좋겠어, 어르신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서 들어주는 누군가가.” 아무래도 사람이었다. 자극적이고 반짝이는 문화들이 눈에 띄는 요즘에 옛날이야기에 관 심을 두는 젊은이들이 별로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점점 재미있는 일들이 청호동 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폐쇄되었던 오징어할복장이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청호동 아마이들에게 향수를 일으키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젊은 작가들이 청호동 이야기를 저마 다의 방식으로 읽고 풀어냈다. 2023년 진행된 공존문화지대 프로젝트 일환인 ‘속 깊은 마 을, 살펴보는 걸음’은 주민과 예술가들이 함께 협력하여 이룬 전시로 아마이들의 추억과 젊 은 세대들의 새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유의미한 전시였다. 그는 이러한 예술적인 흐름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방향으로 발전되길 소망했다. 청호동에는 이제 문 화와 예술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흐름에 심삼옥 국장이 힘을 보태고 있는 장소는 ‘아트플랫폼 갯배’이다. 이곳이 세 워지기 전에는 쓰레기 더미가 버려지고 쌓여있는 마을의 음지였다고 했다. 정착하지 못하 고 바다 위를 부유하는 해양 컨테이너의 모습이 실향민과 닮은 것에서 영감을 받아 두 개의 포개어진 컨테이너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주변에는 실향민들의 상징인 보따리 조각상이 드문드문 놓였다. 2016년 마을미술프로젝트를 통해 설립된 이 공간에서는 사진, 회화와 같은 시각 예술 전시가 꾸준히 열린다. 또한 내외부적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제공되 고 있다. 이곳의 큰 매력은 장벽이 없다는 점이다. 전문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자 유롭게 예술적, 문화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속초의 보석 같은 곳이다.
지키는 사람들 140
141 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유난히 해가 쨍쨍했던 날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리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청호동은 실향민의 시대, 오징어와 명태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시대는 어르신들의 옛날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이고 오래된 좁은 길에 의미를 부여할 때 시작된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속초이스트 심삼옥 국장이라서 청호동의 역사를 참 재미있게 풀어준 것 같다.
테이블에 올리는 사람들
이상규
이창복
이상규
보드니아 로스터리 커피하우스 대표
테이블에 올리는 사람들 144
145 나는 속초주의자입니다
속초,커피 그리고 영랑호
유난히 춥고 쌀쌀한 날이었다. 폴킴의 ‘커피 한 잔 할래요’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영랑호변에 자리잡은 보드니아 로스터리 커피하우스(이하 보드니아)를 찾았다. ‘커피 한 잔’의 의미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무척 다양할 것이다. 단순히 커피가 마시고 싶거나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커피에 기대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이어주고 녹여주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이상규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드니아의 시작
보드니아는 청학동 사거리 중앙시장 인근에서 2012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이듬해 3월에 오픈했다. 유동인구가 제법 되는 큰길가에서 중앙시장을 찾는 현지인과 관광객을 타깃으 로 운영했다. 1~2년 정도 하다 보니 단골도 생기고 처음에 목적했던 속초 사람들의 동선 도 파악이 되었다. 원래 10년을 보고 월세로 시작했지만 4년 뒤 2017년 1월 영랑호가 코 앞에 펼쳐져 있는 지금의 아늑한 공간으로 이전했다. 창가 좌석에 앉아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영랑호를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기에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없 어 보였다. 영랑호 건너편으로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진 울산바위를 보고 있으면 마치 세 상을 다 얻은 기분이 든다.
익숙하고 편안했던 마음의 고향 속초
서울에서 태어난 이상규 대표는 속초 이주 전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 은 막상 고향에 살고 있으면서도 실향민의 마음을 느낀다고 한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곳이 모조리 사라진 낯선 느낌. 추억만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다는 말에는 왠지 모르게 속초의 실향민들과 닮은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그래서 속초로 이주하게 된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가족들과 속초 여행을 많이 왔다. 대학 시절 엠티도 왔던 곳이라 속초가 굉장히 낯익은 느낌이 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금요일 저녁에 와서 바닷가에서 일출을 보고 토요일에 돌아가는 일 정으로 자주 왔었죠. 거의 한 두 달에 한 번 정도씩은 주말에 왔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 만 해도 3시간 반 정도는 걸려야 속초에 왔는데 뭔가 적당한 거리감이 있다고 할까요. 멀 리 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멀게 느끼지 않는 적당한 위치에 속초가 있 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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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CJ CGV에서 홍보팀장으로 근무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다 보니 항상 성수기와 주 말에 제일 바빴던 탓에 멀리 떠나는 여행이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속초는 거리나 위치 가 적절하고 산과 바다, 호수를 모두 갖추고 있어 사시사철 언제나 쉬었다 갈 수 있는 곳 이었다. 지역이 작아 몇 번만 다녀보면 모든 길이 머릿속에 쏙 들어와서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것 같이 느껴지다 보니 항상 오면 마음이 편했다.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만큼 더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대우자동차 홍보 10년, 그리고 CJ CGV 홍보팀장 10년, 이렇게 회사 생활 딱 20년을 하 고 마감했는데 사실은 마음속으로 애초에 한 20년을 딱 하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많 이 했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도 그런 조직생활이 개인적으로 잘 맞는 스타일은 아니였기 때문이죠.”
속초와 커피가 만나 보드니아로
어린 시절 레코드 가게 같이 음악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장소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하 게 생각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서점에서 음악을 살짝 틀어놓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 다. 그러다 커피에 생각이 닿았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고, 어디를 가 거나 일을 할 때도 꼭 커피를 마실 만큼 좋아하는 음료다.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커피가 지 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아이템이란 생각에 ‘커피 사업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서 시작할 지가 문제인데 자연스럽게 ‘속초에서 하면 되겠 네.’라는 답이 나왔다.
“속초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한쪽에 있고, 나머지 한쪽에는 커피숍을 하면 좋겠다는 생 각이 있었던 거예요. 이 두 가지가 매칭이 된 거죠. 두 가지를 항상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 는데 그때 딱 겹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속초에서 커피숍을 해야겠다는 결론이 나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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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와 커피라는 결론이 나자 이후에는 모든 일이 물흐르듯 진행되었다. 핸드드립, 바리스 타 자격증 등 여러 가지 배워야 할 것이 있지만 커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로스팅이다. 커 피를 어떻게 볶는가에 따라 맛이 결정된다. 커피 맛은 매장의 정체성을 결정짓기 때문에 로 스팅을 계속 반복하며 2년 정도 공부를 했다. 계속 공부할 것들이 많은데 무언가 깊게 파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라 커피 공부가 적성에 맞았다.
“그때 속초에는 로스팅을 직접 하는 카페들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어요. 이 정도 시 장에서 로스터리 카페 하나쯤은 더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보드니아는 빠른 속도로 단골 고객을 확보하며 자리를 잡았다. 직장생활 20년, 커피를 배 우지는 않았지만 계속 커피에 관한 일들을 구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보드니아(Bothnia) 는 북유럽의 바다 이름이다. 핀란드와 스웨덴 사이 내륙으로 길게 뻗어 들어간 만의 이름 이 보드니아다. 보드니아만을 둘러싼 국가들(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바다와 숲과 호수 등 자연경관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며, 1인당 커피소비량이 세계 5위권을 벗 어나지 않을 정도로 커피를 즐기는 나라들이다. 스웨덴에는 피카(FIKA) 타임이 있는데 피 카는 ‘KAFFE’(커피)에서 유래한 것으로 커피와 함께 디저트를 즐기는 시간을 뜻한다. 하 루에 몇 차례 시간을 내어 동료, 가족, 지인들과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는 문화로 스웨덴 사 람들에게 ‘멈춤’, ‘휴식’의 의미를 지닌다. 이 지역의 특징이 숲이 우거져 있고 많은 호수들 을 끼고 있으며 바닷가 옆에 위치해 있는 것인데 이런 느낌들이 속초와 무척 비슷하다. 그 래서 바다를 끼고 커피와 문화가 어우러져 풍요롭게 살고 있는 나라들을 닮은 멋진 카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이상규 대표가 감명 깊게 읽은 책에 있다. “학교 다닐 때 굉장히 유명했 던 김혜린 작가의 ‘북해의 별’이라는 만화가 있어요. 북유럽 쪽에 보드니아라는 가상국가 에서 일어나는 시민혁명을 다룬 스케일 큰 작품이예요. 이 책에 감명 받아 커피의 이상국 가를 만들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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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니아’의 하우스 블렌딩 이름도 그래서 ‘북해의 별’이다. 커피 이름 하나하나가 속초의 이미지들이다. 그러니까 북해라는 것도 속초가 북쪽에 거의 위치해 있는 느낌이고 ‘바다의 노래’, ‘숲의 시계’, ‘달의 호수’, ‘바위의 꿈’ 다 속초의 바다와 숲, 호수, 그리고 울산 바위 를 생각하며 블렌딩해서 그러한 이미지를 담고 이름을 이렇게 붙여놓은 것이다. 시즈널 커 피는 ‘어느 봄날’, ‘여름이야기’, ‘가을의 전설’, ‘겨울나그네’ 라는 이름으로 계절별로 나눠 서 속초의 사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인터뷰를 하는 오늘은 가을의 마지막 날로 오늘 까지만 마실 수 있다는 가을의 전설이라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에 다닐 때 북유럽을 한 번 가봤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속초와 꼭 닮은 그곳에 나도 언젠가 꼭 한 번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하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로 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잠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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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장사의 꿈
너무 간단하기도 하고 또 너무 어렵기도 한 것이 커피다. 맛있는 커피를 만들려면 일단 많 이 내려 봐야 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꾸 해봐야 패턴과 노하우가 생기기 때문에 직 접 만들어보면서 경험해봐야 한다. 핸드드립도 정성껏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똑같은 원두 를 똑같은 분쇄도로 갈았을 때도 내리는 상황이 느긋하냐 빠르냐 하는 것에 따라 맛이 달 라진다. 그래서 2019년부터 노 그룹 존(어린이포함 4인까지만 입장 가능)을 운영하며 조 용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커피 맛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벚꽃시즌에 많은 관광객들과 테이 크 아웃으로 인해 카페가 아수라장이 되어 분위기를 해치는 것을 경험하고 내린 결정이다. 테이블도 몇 개 빼면서까지 이렇게 운영하는 이유는 손님들이 같은 커피를 마셔도 조용한 날에 커피의 향과 맛을 더 잘 느끼고 분위기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바쁜 날에 는 자신감이 떨어질 정도라 컨트롤 가능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최상의 커피 맛을 좌우한 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스템을 바꾸고 나니 코로나 시기에도 원래의 일상적인 루틴과 큰 차이가 없어서 별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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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카페를 운영하는 매일 매일이 기쁘다. 장사라곤 카페를 운영하면서 처음 해보는데 아 침에 오픈 준비하면서 제로에서 시작해 마감할 때 보면 비슷하게 매출이 생기고 느리지만 점점 단골이 쌓여가는 것을 볼 때 참 좋다. 단골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하 면 할수록 점점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하니 너무 행복하다. 나중에는 단골손님들로만 운영하 는 가게를 꿈꿔보기도 한다. 하루하루 그 꿈에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지금이 제일 좋 은 시간이다.
언젠가 매출 목표에 대해 묻는 분이 있었다. 지속 가능한 카페가 되는 것이 목표일뿐 매출은 사실상 큰 목표로 세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고객을 생각하고 지속가능성에 대해 큰 그림을 그려가면서 운영해 왔을 때 사업이 더 큰 문제없이 잘 진행되는 것 같다.
“이제부터가 제 전성기예요. 지금까지 10년 넘게 공부 했던 것들을 펼칠 때거든요. 그래서 제가 주전자를 들 힘이 있을 때 까지는 쭉 그렇게 운영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 서 카페를 운영한다는 것은 제 커피를 좋아하는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와주신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저는 그만큼 계속 맛있는 커피를 볶고 내리고 또 단골손님들이 드셔주시고 하는 것 이 끊기지 않고 계속 갈 수 있었으면 해요.”
영랑호와 더불어 행복한 사람
속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어딘지 물었더니 영랑호라고 했다. 영랑호를 빼고는 이야 기할 수 없다고. 초지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영랑호 이야기 뿐이다. 청학동에서 카페를 운 영하고 있을 때부터 영랑호에 와서 운동도 하고 자주 왔다 갔다 했다. 한 번도 안 와본 사람 은 있어도 한번만 와본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한번 가보면 다음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야 하는 곳이 바로 영랑호다. 속초하면 영랑호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 연석호인 영랑호를 자세히 본 사람들은 영랑호가 속초여행의 필수 코스라고 말한다. 보드 니아도 영랑호와 같은 이미지의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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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로 처음에 이사 와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바로 환경연합에 가입한 거예요. 환경연 합에 직접 찾아가서 회원가입을 했어요. 내가 영랑호를 지키는데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 이 영랑호를 보자마자 들었어요. 자연은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영랑호를 가로지르는 부교가 놓이면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어떤 분들은 마지막 남 은 고향의 느낌이 영랑호였는데, 고향이 망가지는 것을 보는 기분이라고 했다. 수도권 지역 은 모르겠지만 특별히 자연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속초와 같은 관광지에서는 자연을 대 하고 새로운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에 있어서 다른 지역들보다 조금 더 높은 감수성을 가져 야 한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레벨의 잣대로 생각하면 정말이지 남아나는 게 없을 것 같다.
“매일 영랑호 한 바퀴를 돌면서 운동을 해요. 이전에는 산책하고 자전거를 탔는데, 산책 만 하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한 바퀴씩 뛰어야 겠다 생 각했죠. 덕분에 올해 감량 목표도 달성했습니다. 영랑호가 건강까지 선물하는 고마운 장소 죠. 매일 저녁마다 1시간 정도 천천히 뛰면서 굽이굽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영랑호가, 속초 가 새롭게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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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속초의 만남으로 일상의 기쁨과 만족을 갖게 된 사람, 영랑호를 누리며 지키는 일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 이상규 대표의 나날은 앞으로 더 행복할 것 같다.
이창복
30여년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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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면 어김없이 바다에 나간다
“해 뜨는 거 자주 보냐고요? 말도 마세요. 해 뜨는 걸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어요. 바다에 나가면 정신없이 일이 바빠요. 일하다 보면 그냥 날이 훤해져요. 조업을 마치고 바다에서 돌아올 때는 좀 여유가 있어요. 그때 바다에서 바라보면 속초가 정말 아름다워요. 설악산 중턱으로 안개나 구름이 걸쳐 있는 걸 보면, 정말 멋있다는 말이 절로 나와요.”
아침을 바다에서 맞는 이선장
바다에 나간 어부들은 떠오르는 해를 매일 볼 수 있지 않을까? 배 위에서 맞이하는 해돋이 는 얼마나 멋있을까? 사람들은 바다와 어부에 대해 이런 상상을 한다. 그러나 30여년 어부 이창복 선장(58세)의 한마디에 낭만적인 상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어부에게 바다는 생활의 터전인 작업장이다. 물론 이창복 선장은 다른 누구 못지않게 속초 바다를 사랑한다. 그는 30여년 동안 자신을 먹여 살려준 바다가 너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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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루는 한밤중에 시작된다. 새벽 2시 20분에 눈을 떠서, 새벽 3시면 청호동 부두에 서 화진호를 끌고 바다로 나간다. 40분 정도 배를 몰고 나가면 양양 낙산 앞바다에 이른다. 먼저 전날 띄워놓은 그물을 당겨 올리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뺏겨 낸다. 그리고 다시 그 물을 바다에 부려 놓는다. 바다에 나가면 정신없이 바쁘다. 항상 긴장해야 한다. 그가 화진호를 몰고 나가서 조업하는 낙산 앞바다는 바람이 세게 불기로 유명하다. 바람이 거세면 파도도 심하다. 2~3미터 높이 의 파도가 뱃전에 부딪치면, 하얗게 물보라가 배에 들이친다. 배가 파도에 심하게 흔들려, 앉아 있지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때도 있다. 한겨울 영하의 바다는 육지보다 더 춥다. 1, 2월 추운 날은 잡은 물고기를 배 갑판에 1분만 놔둬도 그냥 꽁꽁 얼어버린다. 손발이 꽁꽁 얼 정도로 겨울바다는 춥다. 바람과 파도에 맞서며 그물을 당기고, 부리고, 물고기를 빼어내는데 2~3시간 정도 걸린 다. 조업이 끝나면, 다시 40분 정도 배를 몰아 속초항으로 들어온다. 항구에 들어오면 아 침 7시 쯤 된다. 늦게 들어오면 고기 값을 제대로 못 받을 때가 많다. 살아있는 활어는 동 명항 위판장에서, 죽은 선어는 수협 공판장에서 팔고, 식당에서 쓸 생선도 따로 챙긴다. 아 침 8시쯤이면 위판을 마치고 부두에 들어온다. 당겨온 그물을 추리고 정리하는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오전 10시 쯤 뱃일을 다 마치고 생선을 가지고 먹거리촌에 있는 식당으로 온 다. 그리고 아내와 같이 밤 9시까지 식당일을 한다. 하루 일을 다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밤 10시가 넘는다. 속초 연근해 조업 어민들은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해 출어를 하지 않는다. 이선장은 기상 악화로 주의보가 내린 날이나 일요일을 제외하면, 1년에 270~280일은 바다에 나가 조업 을 한다. 바다에는 형과 같이 나가기도 하는데, 형이 나이도 있고 몸이 안 좋아 혼자 배를 타고 나가 조업을 할 때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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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청년 어민후계자가 되다
이창복 선장은 청호동 1통 1반, 갯배 선착장 부근 신포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 모두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 출신 실향민이다. 한국전쟁 때 각각 피난을 내려와 아는 사 람의 주선으로 결혼해서 속초에 정착했다. 부친은 백조호라고 배 한 척을 갖고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병이 나서 앓다가 돌아가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가서 공장에 취직해 일을 했다. 그리고 단기병으로 속초 일복 문화관 옆 군휴양소에서 취사병으로 복무했다. 제대 후 매형의 주선으로 멀리 경남 진주에 가서 포장마차도 했다. 그러나 밤 12시 이후 포장마차 영업이 금지되어 장사를 그만두었다. 25살 때 속초로 돌아와 배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형이 끌던 배에 선원으로 타면서 양 미리 조업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바다일이 낯설지 않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이미 덴마(전 마선)을 타고 집 앞 수로에 나가 2년 넘게 조개를 파서 내다 팔았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누 운 후로 어려운 집안살림에 보탠다고 바다일을 제법 많이 했다. 어부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1년 어민후계자가 되어 자금을 지원받아 배를 한 척 장만했다. 드디어 20대 청년어부 이창복이 ‘화진호 이선장’이 되었다. 이창복 선장은 20년 가까이 양미리를 잡았다. 한 때는 앞바다에서 나는 오징어도 많이 잡 았다. 5월부터 7월까지 꽁치도 많이 잡았는데, 지금은 꽁치가 다 사라졌다. 지금은 앞바다 당일치기 조업으로 유자망으로 철 따라 나오는 여러 잡어를 잡는다. 가자미와 대구, 물망치, 물곰은 사철 잡히는 물고기이다. 가자미는 1년 내내 꾸준히 잘 잡 힌다. 대구도 사계절 나오지만 기복이 심하다.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큰 대구가 잡 히고, 4,5월은 ‘방망이 대구’라 부르는 작은 대구가 잡힌다. 겨울 대구가 가장 맛있다. 싱 싱한 애(간)나 곤지(정소)를 같이 넣어 끓여 먹는다. 물망치는 1년 내내 나오는데 양이 많 지 않다. 물곰은 올해 잘 잡히지 않는다. 올해는 10kg 짜리 물곰 한 마리 가격이 40~50만 원까지 나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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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호 이선장네 식당의 특별한 별미
“배를 타면 먹고는 사는데, 돈이 모이지 않아요. 그래서 2001년에 내가 잡아온 걸 직접 싸 게 팔아보자고 식당을 차렸어요. 식당까지 차리고 나서 20년 이상 하루에 3~4시간밖에 잠 을 자지 않았어요.”
이창복 선장은 2001년 조양동 웰컴콘도 옆에 ‘이가네 회덮밥’을 개업했다. 직접 잡아온 생 선으로 조리해 회덮밥과 물회, 회국수를 비롯해 대구탕, 물곰탕, 코다리해장국 등을 팔았 다. 그는 그냥 식당 홀만 지키지 않고, 인근 지역까지 직접 배달도 다녔다. 13년 동안 조양 동에서 식당을 하다가, 2014년에 먹거리촌으로 식당을 이전했다. 이때 상호를 ‘화진호이 선장네’로 바꾸었다. 배 이름을 넣어 어부가 직접 운영하는 식당이라는 내용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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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장네는 다른 식당보다 음식 가격이 저렴해 지난 2022년부터 속초시 착한가격업소로 등록되었다. 직접 잡아온 생선을 식재료로 쓰기에 저렴한 음식 가격이 가능했다. 이선장네 는 다른 집과 구별되는 두 가지 별미 음식이 있다. 별미음식 한 가지는 명태코다리탕이다. 이 음식은 명태가 많이 나는 북청군 신포 출신 어머 니가 고향에서 해먹던 방식으로 끓여줘서 이선장이 어렸을 때 많이 먹었다. 반건조식으로 약간 구덕하게 말린 명태 코다리와 무를 넣고, 장을 풀어 끓인 탕이다. 시원하면서도 구수 한 맛이 일품이다. 이선장이 이북 출신 실향민 어르신들께 추천하는 향수의 음식이다. 속초 에 명태가 많이 날 때는 실향민들뿐만 아니라 속초사람들도 많이 먹던 음식이다. 지금은 앞 바다에서 명태가 나지 않아, 러시아산 수입 명태로 명태코다리탕을 끓인다. 다른 별미음식은 가자미탕이다. 이창복 선장은 강원도에서도 가자미탕을 파는 집은 이곳 밖에 없을 거라고 자부한다.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어구가자미(용가자미) 껍질을 깨끗이 솔로 씻어 간장을 조금 풀어 넣고 맑은 소금국을 끓이셨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속을 풀 때 즐겨 드신 탕이다. 요즘은 어구가자미가 잘 나오지 않아 물가자미로 끓여낸다. 가자 미탕이 좋아 이선장네 집을 찾는 미식가들도 제법 있다고 한다.
손꽁치잡이와 꽁치전, 창경바리 추억
수십 년 사이에 동해안 바다도 큰 변화가 있었다. 어부로서 실감하는 바다의 변화는 어족 자원이 크게 줄어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옛날에는 정말 고기가 많이 나서, 방파제나 갯배위 틈에 낚시를 집어넣는 ‘구멍치기낚시’를 해도, 놀래미 등을 양동이 로 한가득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명태와 오징어는 물론이고, 흔했던 꽁치도 거 의 사라지고, 임연수어도 거의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민들이 고기를 많이 잡아서 씨가 마른 거 아니냐고 해요. 물론 어민들의 남획 도 영향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수온변화가 큰 원인이라고 봐요. 물고기들은 수온에 굉 장히 민감해요. 기후변화로 예전보다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서, 수온이 맞지 않아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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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가까이 들어오지 않아요. 연근해 오염 때문에 바닷속 생태계가 파괴된 것도 큰 영향 이 있어요.”
그는 꽁치에 대한 추억이 많다. 예전에는 속초 앞바다 조도 근처에 나가 손으로 꽁치를 직 접 잡기도 했다. 바다풀인 뜸북(톳)을 손에 끼워 물에 넣어 흔들면, 뜸북에 산란을 하려고 꽁치들이 몰려와서 손가락 사이로 들어온다. 그러면 손으로 꽁치를 움켜쥐고 배 위로 건져 냈다. 아버지가 바다에 다니실 때는 이 손꽁치잡이를 많이 했다. 그때는 꽁치도 아주 굵었 다. 꽁치알도 흔해, 아버지가 꽁치알을 많이 따오셨다. 냄비에 가득 꽁치알을 담아 쪄서 온 가족이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꽁치전도 많이 만들어 먹었다. 싱싱한 꽁치를 손질해 살을 잘게 다지고 야채를 섞어 둥글넙 적한 모양으로 빚어서 기름에 구워냈다. 꽁치는 기름이 많아 맛이 고소하다. 지금은 앞바다 에서 꽁치가 나지 않는다. 시장에 가도 생물은 없고, 냉동꽁치만 가끔 나온다. 냉동꽁치로 만든 꽁치전은 예전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앞바다 싱싱한 꽁치로 어머니가 해주던 꽁치전 은 추억으로 남은 음식이 되고 말았다. 동해안에서 사라진 ‘창경바리’도 직접 해봤다. 창경바리는 작은 덴마(전마선)을 타고 앞바 다에 나가서 창경을 쓰고 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어로작업이다. 창경(窓鏡)은 1 미터 크기의 나무틀에 유리로 창을 붙여 만든 큰 수경이다. 이 창경을 물속에 집어넣고 바 닷속을 들여다보면서 낫대로 미역을 따거나 문어를 잡았다. 지금 동해안에서 창경바리는 완전히 사라지고, 일부 바닷가 마을에서 어촌생활 체험상품으로 선보이고 있다.
바다는 어부의 큰 은행이다
이창복 선장은 2012년부터 6년 동안 한국수산업경영인속초시연합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수산업경영인연합회는 과거에는 어민후계자라고 부른 수산업경영인들이 어민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결성한 전국적인 어민단체이다. 이선장이 속초연합회장을 맡을 때였던 지난 2015년 6월 속초 어민 한 명이 어선 검사기관과 갈등을 빚고 설악대교에서 투신 자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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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때 1천명의 어민이 모여 부당한 선박검사에 항의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집회를 개최 했다. 그는 강원도내 수산업경영인 모두 속초 집회에 참여토록 독려하고 어민들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애를 썼다. 최근 속초에는 40대 젊은 어부들이 50여명이나 늘었다. 경찰이나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퇴직해서 어선을 장만한 사람도 있다. 젊은 어부들은 그물 조업보다는 혼자서 쉽게 할 수 있는 문어잡이를 선호한다. 바다일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벤츠호, 어기 여차호, 장군이호, 샛별호, 잎새호, 비너스호 등 취향에 맞게 배 이름을 재미있게 지어 붙 이기도 한다. 화진호 이선장은 “예전에 우리 부모님들은 배를 타는 일을 자식들한테는 물려주지 않는다 고 했지만, 나는 자식들한테 바다일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며, “지금은 바다일을 전문 직업이라 여기고, 자식들에게 배 타는 걸 가르쳐 주는 어부들도 많아졌다”고 말한다. 그는 “바다는 어부의 큰 은행이다”라며, “매일 새벽마다 어부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맡 겨놓은 돈을 찾아온다”고 했다. 이창복 선장은 어부들의 큰 은행인 바다 자원이 점점 고갈되어 걱정이다. 이선장네도 올 여 름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후쿠시마 방류를 앞두고 한두 달 은 고기 값도 크게 떨어지고, 식당 손님들도 많이 줄었다. 후쿠시마 방류 이후 다행히 경기 가 회복되었다. 지금이라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의 소망은 소박하다. “어민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도록, 속초를 찾는 관광객들이 속초 수 산물을 더 많이 먹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수고로운 노동으로 속초의 아침을 열고, 싱싱한 바다 기운을 퍼 나르는 부지런한 어부 이창복. 그는 오늘도 새벽 3시 만 되면 어김없이 바다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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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안태호
사단법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활동가를 시작으로 웹진 ‘컬처뉴스’ 편집장, 부천문화재단 팀장 등을 거쳤다. 함께 쓴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철공소>, <노년예술수 업> 등이 있다. 스무 살 무렵 빼어난 재능들에 주눅 들어 창작을 포기한 후, 예술 동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문화정책과 기획 관련 일을 해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문화 소비자가 꿈이 며, 여전히 만화를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엄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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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을 제외하곤 줄곧 속초에서 살았다. 지역 주간신문인 ‘설악신문’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외부 필자로 신문에 글을 써왔다. 사람 사는 이야기와 지난 시절 옛이야기라면 귀가 솔깃해 인물과 향토사 관련 책을 몇 권 썼다. 정신없이 변해가는 속초의 풍경에 익숙지 않아 항상 마음 한편에 과거의 기억을 담고 있다. <설악의 근현대인물사>,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실 향민의 삶>, <동해안 납북어부의 삶과 진실(공저)>, <동쪽의 밥상>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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